닫기 공유하기

[전문] 이옥형 서울고법 판사, "가장 판사다운 1명 잃었다"

[편집자주]



1. [범죄와의 전쟁] 아침 출근 길,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 붙어 있는 영화광고, 배우들의 살아있는 표정도 좋고 카피도 좋다. 역시 최민식은 최고의 배우다. 
 

2. 그런데 사무실에 도착하니 슬픈 소식이 기다리고 있다. 정말 슬펐다.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천성이 게을러서 간섭받지 않고 평화롭게 그냥 살고 싶다. 세상만사에 관심을 갖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힘든 일인가? 그러다가도 세상에서 벌어지는 부조리가 나의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정신이 버쩍 들기도 한다.
 

3. 그는 순진하고 착한 사람이다. 나와는 달리 자기행동과 그에 따른 이불리에 대한 영민한 계산이 없다. 아마도 그의 카톨릭 신앙에서 나오는 듯하다. 그러한 그의 성격 탓으로 모두에게 원만하고 조직, 특히 윗사람에게 고분고분하기를 기대한 이들에게 그의 언행은 당혹스러운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라 어떤 법원장 또는 합의부의 부장은 고분고분하지 않고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며 때로는 자기 생각대로 밀고 나가는 그가 미웠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는 바른 말 잘하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 아닌가? 대부분의 판사들은 그가 연임심사를 무사히 통과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의 언행에 다소 튀는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법원조직법 상의 연임부적격 사유라고 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판사들이 느끼는 것과 오늘의 결정 사이의 간극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4. 나로서는 이 시대에 가장 판사다운 판사 1명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더 가슴아픈 것은 판사 1명을 잃은 것이 아니라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판사의 정신과 기개를 잃었다는 것이고 우리 법원은 이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판사들은 법원장으로부터 근무평정을 좋게 받지 못하면 판사직을 그만 두어야 한다는 냉엄한 현실을 목격하였다. 꼭 사건처리와 일치하지도 않는다. 사건처리를 못하면 그것을 이유로, 사건처리를 잘해도 조직적응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인간관계가 원만해도 판결에 나타난 국가관이 이상하여 균형감이 없다는 이유로, 무슨 이유로든지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로 좋지 않은 평정을 받을 수 있다. 부장과도 원만하게 잘 지내야 한다. 합의하면서 자기 생각은 살짝만 말해보고 부장의 의견이 다르면 얼른 물러서야 한다. 법원장이 주최하는 모든 행사에 꼬박꼬박 참석하여야 한다. 법원장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였는지 나는 알 수 없다. 평정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사법관료화’라는 브레이크 없는 벤츠는 그 끝을 모르고 달릴 것이다. 사법행정은 재판작용을 지원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말일 뿐이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근무평정을 무기로 재판작용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나는 그것을 역사적으로 목격했다.
 

5. 나는 운이 좋아 2년 전에 연임이 되었다. 그도 2년 전에 연임심사를 받았으면 과연 오늘과 같은 결과였을까? 내가 2년 전이 아니라 2012년에 연임심사를 받았으면 내가 지금 법원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이제 나에게는 8년의 임기가 남아있다. 이제 우리 모두는 남은 임기를 카운트하면서 살아야 하는 가련한 인생을 살게 되었다. 아마도 보통의 판사들은 연임 결정 2~3년 전부터는 신경이 쓰일 것이다. 헌법과 법률이 나에게 8년의 시간을 허락하였으니 그와, 연임의 공포에서 살지 않은 세대로서 아직 연임을 받지 못한 분들을 위해서라도 헌법과 법률이 부여한 책무-국민의 생명과 신체, 인권의 보호, 사법권과 재판의 독립-를 다 하여야겠다는 다짐을 다시한번 한다. 이번 일을 계기로 판사들의 입은 더 얼어붙겠지만 나는 내가 속한 법원에 할 말이 많다. 이 시대 사법부는 국민에게 법원을 믿어달라고 말할 수 있는가?
 

6. 성군이 오기를, 그래서 모든 판사들이 오로지 헌법과 법률과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재판할 것을 기도하였으나, 그 반대로 억압과 배제, 통제와 관리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그래서 나는 쫓겨나는 그가 슬픈 것이 아니라 남아있는 우리의 처지가 슬픈 것이지도 모르겠다.
로딩 아이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