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공유하기

심리전? 실제 공작?…北 '뜬금없는' 난수방송 미스터리

"대남연습에 불과·공작 진행위한 지령문일수도"

[편집자주]

© News1 방은영 디자이너
© News1 방은영 디자이너

1990년 10월17일 '부여 간첩' 김동식은 북한의 '평양 방송'에 단파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췄다. 아침과 저녁 시간 '내 고향'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오는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노래가 나오면, 북한에서 내려온 안내조와 접선할 수 없다는 '사전 약속'이 북에서 이뤄졌다. 그날 밤 김동식은 북에서 내려온 안내조와 묘지에서 접선했다. 이를 통해 김동식은 북한의 '거물 직파간첩' 이선실을 무사히 북으로 귀환시킬 수 있었다.

지난 1995년 충남 부여에서 우리 측과 총격전 끝에 검거된 '부여 간첩' 김동식의 수기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않았다'에 나오는 남파 간첩의 비밀통신 방식이다.

이처럼 한국내 북한의 고정간첩들은 평양방송에서 특정 노래가 나오는지 유무를 확인하는 방법 이외에도 숫자가 어지럽게 얽혀 배열돼 있는 난수(亂數)표를 활용한 암호 송수신통신 방식도 널리 활용해 왔다.

그러나 이 방식은 '적'들의 입장에서 의외로 보안에 취약했다. 난수방송은 단파라디오만 있으면 우리 측 국가정보원, 국군정보사령부 등 정보당국도 동시에 청취할 수 있다.

남파 간첩들이 주로 사용한 난수표는 과거 우리 당국이 격파한 잠수정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 정보당국은 이를 통해 북한 난수방송 해독에 나서기도 하는 등 역공작에 사용했던 것으로도 알려졌다. 

이같은 이유에서 북한 공작당국은 어느 순간 아날로그 방식의 난수방송을 더이상 하지 않게 됐다. 그보다 쉽고 편리한 인터넷 등 첨단 통신 방식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지난 2011년 북한 지령으로 국내에서 간첩 활동을 벌인 혐의로 공안당국에 적발된 종북지하당 '왕재산'은 우리 당국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스테가노그래피' 기법을 썼다. 이 기법은 비밀 지령문을 신문기사, 그림, MP3파일 같은 '파일 안 파일'로 숨겨 메시지를 전달하는 최첨단 암호화 프로그램이다.

당시 검찰이 '왕재산' 총책으로부터 압수한 휴대용 저장장치(USB메모리)에는 확장자명 '.doc'인 평범한 문서파일 안에 특수 프로그램을 활용한 '북한 지령문'이 발견되기도 했다.

최근 북한이 2000년 제1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중단했던 남파 공작원 지령용 난수방송을 16년 만에 평양방송을 통해 재개한 것을 놓고 대북 전문가들 사이에 해석이 분분하다.

북한 평양방송은 지난 15일 정규 보도를 마친 0시45분부터 12분간 여성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지금부터 27호 탐사대원을 위한 원격교육대학 수학 복습과제를 알려드리겠다"면서 "459페이지 35번, 913페이지 55번, 135페이지 86번"과 같은 식의 숫자를 잇달아 방송했다. 전형적인 남파간첩용 난수방송을 재개한 것이다.

이와 관련 정준희 통일부 대변인은 20일 정례 브리핑을 통해 "상당기간 동안 자제해오던 난수방송이 재개된 것에 대해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북한이 구태의연한 태도를 빨리 지양하고 남북간 발전에 기여하는 행동에 나서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난수방송 재개가 지령을 받을 공작원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도를 공개된 장소에서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다"고 전했다.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은 이날 페이스북을 통해 "북이 난수방송을 하는 건 심리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지령을 받을 공작원이 있다는 겁니다"라고 했다.

이를 놓고 대북 전문가들은 △단순 시험방송 △대남훈련 △우리 수사기관에 혼선을 주기 위한 심리전의 일종 △실제 남한 내 고첩을 향한 지령문 등의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북한의 난수방송 재개 이후 우리 정보당국도 과거의 정보 전문가들을 수소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안당국에 몸담았던 한 대북 전문가는 "여러 사람이 동시에 들을 수 있다는 측면을 감안하고, 훈련이 아니고 실제 상황이라면, 대규모 공작을 동시에 진행하기 위한 일제 지령문일수도 있다"며 "최근 북한의 위협사항 등을 감안해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로딩 아이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