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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기의 책보기] 영화와 명화와 여행과 베네치아

김영숙, 마경 공저 '영화가 묻고 베네치아로 답하다'

[편집자주]

'영화가 묻고 베네치아로 답하다' 책 표지
'영화가 묻고 베네치아로 답하다' 책 표지

"조선 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은 참으로 이상하오.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들이외다.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 내 자식의 어미이기 전에 첫째로 나는 사람인 것이오. 내가 만일 당신네 같은 남성이었다면 오히려 호탕한 성품으로 여겨졌을 거외다."

1934년 조선의 신식 지식인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신여성 화가 나혜석이 잡지 <삼천리>에 기고했던 '이혼고백서' 일부다. 낮에는 도덕을 부르짖다가 밤이면 타락의 늪에 빠져있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남녀불문 나혜석을 공격했다. 그들의 치부를 나혜석이 제대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지독스럽게 남성 중심, 가부장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여성'을 투쟁했던 서양화가이자 대중 스타 신여성 '정월 나혜석'은 결국 무너졌고, 행방불명 됐다가 1946년 저잣거리에서 쓸쓸히 숨을 거뒀다. (박정윤 장편소설 '나혜석, 운명의 캉캉').  

1970~80년대 공전의 히트를 쳤던 영화라면 조선작 원작소설의 '영자의 전성시대'를 빼놓을 수 없다. 애닯고 습기 촉촉한 목소리로 "추워요. 꼭 안아주세요. 오늘밤은 왠지 그동안 저를 스쳐갔던 모든 남자들이 불쌍해요"라던 영자의 대사가 클라이막스(?)였던 이 영화는 산업화에 떠밀려 농촌에서 서울로 와 창녀가 돼야했던 한 여자와 그녀를 사랑했던 청년의 기구한 운명을 다뤘다. 19금이 지금보다 훨씬 엄격했을 때 이 영화는 제목과 포스터만으로도 혈기왕성했던 관객들의 애간장을 녹였다.

만약 누군가가 영자와 나혜석을 씨줄 날줄로 재치있게 엮어서 그 배경인 '서울'을 이야기한다면 페미니즘의 역사, 산업화의 빛과 그림자, 서울의 변화 등 상당히 독특한 스토리가 나오지 않을까? 신간 '영화가 묻고 베네치아로 답하다'가 바로 그런 독특한 발상으로 '베네치아 스토리'를 엮었다. 로마도 있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는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아름다운 물의 도시'라고 말하자니 몹시 허탈하다. 영화로 TV로 수도 없이 그 아름다운 도시를 봤지만 아직 가보지 못해서다. 심지어 도시 이름은 모를지라도 미로처럼 얽힌 물길 사이사이 고풍스런 대리석 건축물들과 삿대 저어 가는 곤돌라의 풍경은 대부분 사람들의 머리 속에 들어있다.

2인의 저자 중 김영숙은 음악, 그림, 사진에 조예가 깊다. 음악과 그림에 대한 저서도 여러 권이다. 마경은 방송 대본 작가인데 영화와 여행광(狂)이다. '여행에서 돌아올 때 다음 여행지가 정해지지 않으면 불안해진다'는, 참으로 '기구한 팔자'를 타고 났다. 이 두 전문가이자 저자들이 서로 역할을 나눠 베네치아가 배경이었던 유명 '영화'를 중심으로 관련된 명화, 역사, 사진을 섞어 그 도시의 과거와 현재를 기행(紀行)한다.

'베로니카-사랑의 전설' '리틀 로맨스' '섬머타임' '카사노바' '돈 룩 나우' '조르조네와 폭풍'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 '베니스의 상인' 등 7개의 영화가 주연이고, 수백 장의 사진과 명화가 조연이다. 물론 주인공은 이들 사이를 베네치아의 운하처럼 자연스럽게 연결해가는 '이야기'들이다. '베로니카'가 바로 앞에서 말했던 '나혜석과 영자' 이야기 그대로다. '리틀 로맨스'의 곤돌라 키스와 "날 보기라고 불러줘" "왜지?" "우린 연인이니까"라는 아름다운 대사가 왜 필자의 이름 '보기'를 호출하는지 궁금하고, 베네치아와 베니스가 다른 이름 같은 도시라는 것을 모르는 독자가 있을까 염려된다. '비잔틴, 콘스탄티노플, 이스탄불'처럼.

 ◇영화가 묻고 베네치아로 답하다 / 김영숙, 마경 공저 / 일파소 펴냄 / 1만7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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