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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노동자 보호법' 시행 D-1…현장은 "기대반 우려반"

"진상고객 응대 중지. 노동자 아닌 사업주가 결정 한계"
"'고객은 왕' 인식 버려야"…노동부 "숙려 거쳐 개선할 것"

[편집자주]

© News1 방은영 디자이너
© News1 방은영 디자이너

# "슬퍼야만 우는 거 아니잖아요. 좋아 죽겠다는 듯이 웃다가 울어봐요."
한 대기업 콜센터에서 상담원으로 일하는 여성 A씨가 고객으로부터 받은 요구다. A씨는 도움을 구하려고 관리자를 호출했지만 '그냥 따라서 해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 한 대기업 대형마트에서 일하는 여성 B씨는 옆구리와 허리 등 신체 부위를 툭툭 치는 남성 고객에게 "몸을 건드리지 말고 말로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남성은 "내가 성희롱이라도 했다는 거냐"며 되레 노발대발했다.

노동자가 자신의 감정상태를 억누르고 고객을 우선 응대하는 '감정노동'의 사례들이다. 대형마트·백화점에서 고객을 대면 상대하는 판매원이나 콜센터 전화상담원들이 주로 감정노동에 노출돼 있다.

지난해 1월에는 전주의 한 콜센터에서 실습 중이던 특성화고 학생이 감정노동으로 인한 스트레스에 못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같은해 9월에는 부산의 한 콜센터 상담원이 고객의 지속적인 욕설과 협박에 실신하기도 했다.

이 같은 일이 계속되자 근로자를 감정노동 스트레스로부터 보호하도록 사업주의 의무를 규정한 '감정노동자 보호법'(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지난 3월30일 국회를 통과, 18일부터 시행된다.

감정노동자들은 법안 시행에 기대를 드러내면서도, 법안이 이들을 감정노동으로부터 실질적으로 해방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감정노동자 보호법은 고객이 무리한 요구나 폭언을 하는 경우에 고객 응대를 멈출 수 있는 결정을 사업주가 하게 하고 있다. 이 같은 결정을 노동자가 스스로 할 수 없고 협력업체 직원들은 사각지대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한계로 지적된다. 

◇"상담원이 직접 전화 끊을 수 있어야…'고객은 왕' 인식도 문제"

콜센터 상담원들은 '전화를 끊을 수 있는 권리'가 상담원에게도 보장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다산콜센터 상담원 임모씨(43)는 "다산콜센터에는 지난 2014년 부적절한 전화를 끊을 수 있는 '원스트라이크아웃제'가 도입됐다"며 "제도가 생기기 전에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나를 안내하라'며 상담원을 내비게이션처럼 부리는 고객이 있어도 전화를 끊을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권혜원 동덕여자대학교 교수는 "감정노동자들이 전화를 끊을 수 있는 권리를 법으로 명문화할 필요가 있다"며 "성희롱·욕설뿐 아니라 하대·비꼬는 태도·무리한 요구에도 응대를 멈출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산콜센터에서 일하는 상담원 임모씨(43)는
다산콜센터에서 일하는 상담원 임모씨(43)는 "'원스트라이크아웃제가 생기기 전에는 고객이 불합리한 요구를 해도 전화를 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2018.10.17/뉴스1© News1

'고객은 왕'이라며 고객 주권을 강조하면서도 노동자의 권리와 존엄성은 희생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인식도 문제로 꼽혔다.

권 교수는 "고객의 부당한 언행을 당연한 권리로 여기게 하는 관행이 문제"라며 "고객의 폭언을 직접 규제하고, 상담원의 존엄성을 고객 주권과 동등하게 확립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콜센터의 강도 높은 시간압박과 성과압박이 개선되지 않으면 사업주가 근로자를 제대로 보호할 수 없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이혜진 애플케어상담사노동조합 부위원장은 "고객이 주는 '외부로부터의 감정노동'보다 작업 여건으로 인한 '내부에서의 감정노동'도 못잖다"며 "상담 종료 후 8초 안에 새 고객을 맞아야 하고, 화장실 시간에 5분 제한을 두는 등 통제가 심해 감정노동이 배가된다"고 털어놨다.

이 부위원장은 "감정노동자 보호법 내용대로 사업주가 작업을 중지하거나 휴식을 보장해주려 해도 성과압박이 계속되면 불가능하다"며 "법안에 실효성이 있으려면 이런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고 짚었다.

◇마트 판매원 "위험 고객 자체 판단해야…사업주에 맡길 수 없어"

대형마트 판매원들도 고객 응대를 멈출 수 있는 권한이 노동자에게 직접 주어져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한 국내 대기업의 대형마트 수산물 코너에서 일하는 이모씨(44·여)는 "회사 매뉴얼에는 고객이 폭언을 할 경우 먼저 정중한 어조로 응대하고, 통하지 않으면 단호한 어조로 응대하라고 적혀 있다"며 "그래도 안 되는 경우에는 본사의 직원을 호출하라는데, 실랑이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직원을 부르러 다닐 수는 없어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정민정 민주노총 마트산업노동조합 사무처장은 "마트에서는 현실적으로 사업주가 모든 상황을 모니터할 수가 없다"며 "고객의 폭언·폭행을 하는 경우 판매원이 스스로 판단해 자리를 뜰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감정노동자 보호법은 근로자를 직접 고용한 사업주에게 보호 의무를 지우는데, 이 경우 마트에서 일하는 협력업체 직원들은 제대로 구제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문제도 제기됐다.

한 대형마트 양념육 코너에서 협력업체 소속 판매원으로 일하고 있는 유모씨(40)는 "나는 직접고용 인력이 아니므로 고객과 문제가 생길 경우 마트 직원을 불러도 와주지 않을 것"이라며 "마트 직원에게 지시를 받고 있지만 보호는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정 사무처장은 "협력업체 직원은 마트 직접고용 인력의 2~3배수인데도 고객의 폭언·폭행에 노출되면 각자의 사업주에 전화해 도움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실질적으로 관리·지시를 하는 주체가 책임을 지는 구조로 개선해야 실정에 맞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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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노동자들 "한계 있지만 기대"…고용노동부 "숙려 거쳐 개선"

정 사무처장은 "소위 '진상고객'은 언제 어디에나 있다"며 "그동안 '고객만족'의 기치 아래 기업들이 감정노동을 키워온 측면도 있는 만큼 이제는 단호한 대응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또 "법안에 한계는 있지만 이제는 사업주에 보호 책임을 묻고 법적으로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분명한 진일보"라고 평가했다.

대형마트 판매원 이씨는 "우리도 좋은 취지의 법안이 시행되는 만큼 제대로 시행됐으면 하는 바람"이라며 웃었다.

고용노동부는 시행착오를 거쳐 법안을 차차 개선해 나간다는 입장이다.

고병곤 고용노동부 산업보건과 사무관은 법안이 협력업체 직원을 보호하기 어렵다는 지적에 "원청사들을 상대로 협력사들의 근로자들도 같이 보호할 수 있게 지속적인 홍보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법안을 시행하면서 숙려기간을 거쳐야 할 것"이라며 "원청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방향으로 개선돼야 하고, 사업주가 감정노동에 대해 예방조치를 이행하지 않은 경우 처벌조항을 도입하는 것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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