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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편의 오디오파일] 과거 명연주 현장으로 가는 타임머신

[편집자주]

카라얀 지휘, 런던 필하모니아 연주 '베토벤 교향곡 전집' LP
카라얀 지휘, 런던 필하모니아 연주 '베토벤 교향곡 전집' LP

최근 캐나다 턴테이블 제작사 크로노스 오디오(Kronos Audio)의 루이 드자르댕 대표를 만났습니다. 국내 시연회에서였죠. 하이엔드 턴테이블이 어떤 소리를 들려주는지 제대로 느낀 자리였습니다. 고음질 리마스터링으로 유명한 미국의 2xHD 레이블이 이 회사 턴테이블을 LP 음원 추출용으로 쓰고 있을 정도죠. 

그런데 루이 드자르댕 대표가 자신이 직접 공수해온 여러 LP를 들려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디오는 과거의 명연주 현장으로 데려다주는 타임머신"이라고요. 그러면서 회사이름에 들어간 '크로노스'는 그리스어로 '시간의 신'이라고도 설명했습니다. 

사실 '오디오 = 타임머신'은 개인적으로도 여러번 느끼던 바였습니다. 예를 들어 1972년 데카(Decca)에서 발매된 정경화의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들을 때면, 이 곡이 녹음됐던 그 해 5월15일과 20일 영국 런던의 킹스웨이홀이 눈앞에 확 펼쳐지는 것이지요. 

물론 어느 정도 오디오 시스템이 받쳐줘야 합니다. 기본 사운드는 물론이거니와 킹스웨이홀의 공간감이라든가 잔향, 로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기척 등 음원에 담긴 각종 정보가 고스란히 들려야 제대로 타임슬립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 설연휴 때 한가지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큰형 댁에 갔다가 랙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여러 LP를 발견한 것입니다. 진공관 앰프를 여러 대 자작해서 알텍이나 일렉트로 보이스 같은 빈티지 스피커로 음악을 듣는 열혈 오디오 마니아인 만큼, 어떤 LP를 듣고 있나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때 눈에 띈 것이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런던 필하모니아와 함께 한 베토벤 교향곡 전집이었습니다. 카라얀 하면 따라 붙는 베를린필이 아니라 솔깃했고, 결국 LP 7장짜리 전집을 들고 집에 올 수 있었습니다. 

집에 있는 턴테이블에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이 실린 7번째 LP B면을 올렸습니다. 급한 마음에 귀에 익숙한 합창부터 들어본 것이죠. 더욱이 소프라노가 그 유명한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입니다. 그런데 평소 듣던 9번 4악장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습니다. 무대가 왠지 좁고 밋밋했지만 기름기가 완전히 쏙 빠진 소리라서 나름 듣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언제 어디서 녹음한 것일까 궁금해서 앨범 속지와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바로 오스트리아 빈의 무지크페라인(Muzikferein)이었던 것입니다. 

무지크페라인이 어떤 곳입니까. 빈필의 신년 음악회가 매년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곳이자, 보스톤심포니홀 등을 제치고 지휘자들이 최고의 연주홀로 선정한 소위 '황금홀'이 있는 곳 아닌가요. 때문에 클라이버의 베토벤 교향곡 5번(1974년), 안네-소피 무터의 '카르멘 판타지'(1992년), 안나 네트렙코의 '오페라 아리아 모음곡'(2003년) 등 지금까지 수많은 명반들이 녹음될 수 있었죠. 

더욱이 개인적으로는 지난해 5월 아내와 함께 직접 가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을 들으며 큰 감흥을 받은 곳이기도 합니다. 곳곳을 수놓았던 황금 장식과 천장에 매달린 화려한 샹들리에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다시 9번을 들어보며 황금홀에서 카라얀과 런던 필하모니아가 연주하던 모습을 상상해봤습니다. 카라얀이 런던 필하모니아를 이끌고 이 무지크페라인에서 합창 교향곡을 녹음한 것은 1955년 7월29일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프로듀서는 EMI의 전설 월터 레그였고, EMI에서 스테레오 녹음을 시작한 것은 1955년부터이니 이번 베토벤 전집, 특히 9번은 당시 EMI 녹음기술을 온전히 담았다고 보여집니다. 

흥미로운 것은 1~8번은 모두 1953~1955년 런던 킹스웨이홀에서 녹음됐고, 9번만 무지크페라인에서 녹음이 됐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런던 필하모니아에 합창단이 없었기 때문이라는데, 덕분에 비엔나 합창단이 카라얀+필하모니아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에 한몫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래서 오디오가 재미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카라얀이든 정경화든, 듣고 싶은 명연주 현장을 지금 이곳으로 소환할 수 있는 특권이 너무나 중독적입니다. 그것은 또한 루이 드자르댕씨가 말한 대로 그 당시, 그 현장으로 떠나는 시간여행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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