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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오는 '금강산 가는길'… '현정은 담판' 열릴까

북미협상·남북경협 부진에 北 김정은 '독자개발' 노선 으름장
현대그룹 당혹 속 '南과 철거 협의' 발언에 당사자 대화 희망

[편집자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현대아산사옥. 2019.10.23/뉴스1 © News1 황기선 기자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현대아산사옥. 2019.10.23/뉴스1 © News1 황기선 기자

"위기와 기회가 교차하는 시간"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다가올 한해를 이같이 평가했다. 그러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현대그룹이 독점 개발권을 가지고 있던 금강산 개발사업에서 남측 자산의 철수를 지시했다. 현대그룹에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지난 23일 북한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은 김 위원장이 금강산 관광지구를 현지 지도하면서 남측에서 설치한 시설들을 남측과 합의해 철거할 것을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지는 너절한 남측 시설들을 남측의 관계부문과 합의하여 싹 들어내도록 하고 금강산의 자연경관에 어울리는 현대적인 봉사시설들을 우리 식으로 새로 건설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북측이 이런 금강산을 독자적으로 개발하겠다는 의견을 내비치자 대북 관광사업에 독점권을 가지고 있는 현대아산은 당혹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현대아산은 현대그룹 내에서 대북 사업을 담당하는 계열사다.

이날 현대아산은 배국환 사장 주재로 긴급회의를 열고 대책 마련과 관련한 논의를 진행했다. 현대아산은 언론에 "관광 재개를 준비하고 있는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보도에 당혹스럽지만, 차분히 대응해 나가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위기와 기회가 반복된 20년 금강산 관광史

앞서 현대그룹은 1998년 북한과 금강산 관광 계약을 체결하고 현대아산을 설립해 관광 및 대북사업을 전담하게 했다.

이어 현대그룹은 2000년 8월 북한 노동당 외곽기구인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와 '개성공업지구건설운영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해 개성공단 개발 사업권과 북한 7대 SOC(사회간접자본) 사업개발 독점권 등을 확보했다. 이 독점권에는 백두산 등 명승지 관광 사업도 포함됐다.

하지만 2008년 남측 관광객 박왕자씨가 금강산에서 피격돼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관광은 중단됐다. 현정은 회장이 이듬해 북한을 찾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금강산 관광 재개에 합의했지만 정부 당국 간 입장 차이로 결국 관광은 중단됐다.

이에 북한 금강산 관광 재개가 요원할 것으로 보고 2010년 금강산 관광 지구 내 남측 자산을 몰수·동결했다. 더불어 북한은 2011년 4월 현대그룹이 가지고 있는 독점사업권도 취소할 것이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 News1 최수아 디자이너
© News1 최수아 디자이너

10년째 중단됐던 금강산 관광은 지난해 4월 남북정상회담과 6월 북미정상회담이 연이어 성사되고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자 재개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 이에 현대그룹은 지난해 4월부터 그룹 내 남북경협 사업 TF팀을 설치하고 대북사업 점검에 나섰다.

현대그룹은 일을 맡고 추진할 전문 인력 확보에도 총력을 기울였다. 현대아산은 지난해 11월 남북경협에 관련 경험이 있는 배국환 전 기획재정부 제2차관을 신임대표로 선임하고 회사 창립 멤버로 금강산·개성사업소장을 지낸 김영현 전무를 퇴직 3년만에 다시 불러 관광경협부문장에 앉혔다.

현정은 회장도 올해 신년사에서 "한반도 정세 변화에 따른 남북경협의 구체적인 방안을 준비해야 한다"라며 경협이 실체화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북·미협상 결렬에 관광사업 독자 개발 추진 가닥

현대그룹의 기대와 달리 올해 2월 하노이에서 열린 북미 간 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결렬되면서 금강산 재개에 대한 기대감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하노이에서 북한은 단계별로 비핵화를 진행하고 이에 따른 보상을 받는 방식을 내세웠지만 미국이 비핵화에 대한 일괄타결 방식을 제안하면서 협상이 틀어졌다.

이에 일각에서는 하노이 회담 이후 북한은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점진적인 제재 완화를 약속받고 이를 통해 남측과의 경협을 재개하는 식의 경제 발전 방안을 수정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제기됐다.

이후 금강산 관광 사업에도 기류변화가 드러났다. 북측은 현대아산이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 16주기 행사를 위해 요청한 방북제안에 대해 '내부 사정으로 진행하기 어렵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현대아산은 지난해 정 전 회장의 15주기 행사를 금강산에서 진행했으며 올해 2월 현대아산 창립 행사도 북측의 허가 하에 금강산에서 개최한 바 있다.  

이어 북한은 최근 들어 원산-금강산 관광특구에 중국 자본을 들여오기 위한 위해 투자유치 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중국에서 금강산 관광 홍보도 적극적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국가관광총국에 따르면 지난해 방북한 외국인 관광객을 20만이며 이 중 90%가 중국인이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의 발언을 두고 북한이 교착상태인 남북경협에 대한 기대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관광산업을 개발하려는 시도로 보인다고 밝혔다. 미국과의 협상이 장기전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이 때문에 남측과의 경제협력도 어렵워 지자 유엔의 경제 제재에 포함되지 않은 관광산업을 통해 독자 생존 노선을 선택했다는 해석이다.

© News1 김일환 디자이너
© News1 김일환 디자이너

실제 김 위원장은 "지금 금강산이 마치 북과 남의 공유물처럼, 북남관계의 상징, 축도처럼 되여있고 북남관계가 발전하지 않으면 금강산관광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되여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고 잘못된 인식"이라고 말했다.

조석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김 위원장의 발언을 두고 북한이 남북경협이 지지부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엔의 제재 대상이 아닌 관광사업을 독자적으로 개발하는 '쿠바식 모델'을 택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조 수석연구위원은 "북한이 마식령 스키장에 이어 최근 김 위원장이 백두산에 가면서 관광 단지화된 삼지연의 모습을 보여줬다"라며 "금강산은 지난해 중국 관광객이 20만 정도 왔다는 전례가 있다. 현재의 (미국과의) 대치 국면을 장기적으로 가져가면서도 관광을 통해서 근근이 경제를 유지하겠다는 쿠바식 모델이라고 할 수 있겠다"고 밝혔다.

◇'남측과 협의' 지시가 기회 될까?

다만, 김 위원장이 시설 철거를 '남측과 합의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이번 발언을 계기로 꽉 막혀있던 남북 대화가 민간을 통해 재개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도 이 문구에 대해  "부분적인 남북협의 재개 시그널"이라며 "금강산 사업의 성과를 위해선 대남 협력이 불가피한 현실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현대그룹도 이런 차원에서 위기 속 기회가 있다고 보고 있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북측의 발언을 계기로 후속해서 당국 간 만남, 현대그룹을 포함해 당사자들이 마주 앉을 기회가 생길 수 있다"라며 "향후 상황이 전개되는 것을 파악하며 굳건히 사업을 운영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통일부는 이날 금강산 관광 시설 철거와 관련해 "북측이 요청을 할 경우 우리 국민의 재산권 보호, 남북합의 정신, 또 금강산 관광 재개와 활성화 차원에서 언제든지 협의해 나갈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이와 관련해 청와대 측도 "협의해 나갈 부분들은 협의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금강산 관광 중단 이후 지난 10년간 현대아산의 누적 매출 손실은 약 1조5000억원에 달한다. 매출은 2007년 2555억원에서 지난해 1081억원억원으로 감소했다. 직원도 1100여명에서 180명선으로 줄었다. 

현재 금강산 개발 관련해 현대아산이 투자한 금액은 7800억원 정도다. 이중 해금강-원산지역 관광지구 토지 이용에 대한 50년 사업권에 확보를 위해 투자한 5597억원과 2268억원 규모의 유형자산이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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