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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독립운동가에 방순희 선정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제적 승인 이끌어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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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방순희. © News1


국가보훈처와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5월의 독립운동가로 방순희 선생을 선정했다고 29일 밝혔다.

방순희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해 대소련(러시아) 외교활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그는 한국독립당 중경구당 간부, 한국애국부인회 부주석,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전부원으로 활동했다.

1904년 1월 30일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한 방순희는 1911년 부친을 따라 러시아(구 소련)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해 그곳에서 성장하며 민족의식을 키워나갔다. 1918년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고국으로 돌아와 여성교육의 전당인 정신여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922년 방순희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 신한촌 백산소학교의 교사가 돼 한인 아동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인학교 폐쇄 정책에 따라 더 이상 교육 사업을 할 수 없게 되자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 때부터 반제국주의 혁명운동에 뛰어든 그는 북풍회에 가입하는 등 선전활동에 참여했으나 일제의 치안유지법 발효로 감시 대상이 돼 국내 활동이 어려워 졌다.

결국 중국 망명길을 택한 방순희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의정 활동을 중심으로 남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분열과 갈등 속에서 혼란에 빠진 독립운동계의 통합을 위해 그는 한국애국부인회 재건 등 여성 독립운동가의 역량을 결집했고, 독립운동계의 좌우합작 운동에 동참해 독립의 완성과 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쉼 없이 분투했다.

특히 방순희는 국내외 동포 여성들에게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면서 남편 내조에 그치지 말고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 이와 함께 소련 전문가로서 주중소련대사관을 상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활발히 전개했다.

그는 1944년 중국 국민당정부와 임시정부 간의 협조로 결성된 대적선전위원회를 통해 일본군으로 참전한 한인을 대상으로 한국어방송을 하면서 반일의식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또 일본군의 만행을 동맹국과 국내 동포들에게 알리는데 힘을 쏟았고, 1945년 봄에는 싱가포르 포로수용소에 수용됐던 위안부 여성 10여 명이 충칭 임시정부로 인계돼 보호받게 되자 이들의 교육을 전담했다.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가장 오랜 기간 의정활동을 전개한 여성 독립운동가로 평가 받는 방순희에 대해 정부는 1963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방순희는 1979년 5월 4일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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