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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벌써 1년'…고독사한 김운하 배우 1주기 추도식

[편집자주]

고독사한 김운하 배우 1주기 추도식 현장 사진 © News1
고독사한 김운하 배우 1주기 추도식 현장 사진 © News1
 
지난 26일 아침 인천 연안부두 터미널 근처의 한 건물 입구. 단정한 외모는 못 되는 사내 12명이 아침부터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선글라스를 낀 이도 있었고, 8명은 금발로 염색하고 있었다.

이들은 담배를 피우며 어슬렁거렸다. 몇몇은 편의점 봉투를 손에 들고 있었다. 소주병이 봉투 바깥으로 주둥이를 내밀었다. 아주 수상해 보이는 12명의 사내가 한꺼번에 들어간 건물 2층에는 바다에 유골을 뿌리는 바다장례업체 사무실이 있었다.

장례업체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12명 사내들은 승선 대기실 의자에 몸을 눕히듯 기대고 자기 시작했다. 바다장례업체의 장례지도사가 승선 명부를 내밀며 그 중 한 명을 깨웠다. 어슴프레 잠이 깬 사내 하나는 날림 글씨로 서명한 명부를 이내 옆 사람에게 넘이고 배 출발 시간까지 눈을 붙였다.

이들은 모두 전날 물류회사 심야 하역 아르바이트를 끝내자마자 피곤한 몸을 끌고 인천 연안부두 터미널로 바로 내려왔다. 고독사한 고(故) 김운하 배우의 1주기 추모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12명의 사내들은 모두 고인의 유작 '인간동물원 원초'에 함께 출연한 배우였다.

고인은 소설가 손창섭의 동명 소설을 극화한 이 연극에서 감옥의 방장 역을 맡았다. 감방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당시 출연배우 전원이 삭발했던 '인간동물원 원초'는 2015년 서울연극제 솟아라미래야 부문에서 연출상을 받기도 했다. 당시 심사위원장은 고인을 "방장으로서 감옥 안의 약육강식이라는 권력관계의 중심을 잘 잡아준, 선이 굵은 배우였다"고 평가했다.

1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이들 중 8명이 금발로 염색한 까닭도 연극 때문이었다. 지난 5월1일에 막을 내린 연극 ‘멋진 신세계’에 출연하면서 올리버 헉슬리의 원작소설에 나오는 삭막한 미래사회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이들 외에도 고인의 고향 친구들과 고인이 졸업한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동기들이 하나 둘씩 찾아왔다. 이들을 더한 추도식 참석 인원은 모두 19명이었다. 몇몇은 지하철에서 졸다가 환승을 놓쳐 가까스로 배에 탑승했다고 했다.

고인의 유골을 뿌린 바다로 향할 '푸른바다 호'는 정오가 다 돼서야 출항했다. 선장이 안내방송으로 17번과 21번 부표에 차례대로 가겠다고 알렸다. 추도식 참석자들은 목적지는 17번 부표였다. 자신들의 슬픔에 안내 방송을 듣고서야 다른 망자를 추억하러 온 유가족들도 함께 탔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배가 연안부두를 벗어나자 인천과 영종도를 잇는 '인천대교'가 바다 한 면을 가로막으며 시야에 들어왔다. 긴 머리의 한 여자가 울먹거렸다. 고인과 대학 동기인 그녀는 지난해 생전의 고인을 마지막으로 만난 이였다. 고인의 죽음이 준 충격 탓으로 1년이 지나고서야 이 바다에 찾아올 수 있었다고 했다.

고인은 지난해 6월15일 그녀와 만나 가벼운 술자리를 갖고 헤어진 후, 거주하던 서울 성북구의 한 고시원 방에 들어간 뒤 닷새간 나오질 못했다. 같은달 19일 오전에야 숨진 채로 발견됐다. 검시관은 고인이 알코올성 간질환, 신부전, 고혈압 등을 앓았다고 진단하면서 '지병' 탓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고인은 '인간동물원 원초'의 재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극단 동료들은 당시 고인이 사망했다는 서울 성북경찰서의 연락을 믿을 수 없었다. 고인은 대학 시절 권투와 격투기 선수로 활동할 만큼 건강했고, 극단의 맏형으로서 늘 믿음직한 모습만 보여줬기 때문이다.

고인은 무연고자였다. 대학 졸업 후 예명으로 쓴 '김운하'는 아버지처럼 따르던 돌아가신 외삼촌의 이름이었다. 생모는 고인이 어릴 때 소식이 끊겼다. 극단 동료들은 사재를 털어 2015년 6월21일 서울좋은병원 장례식장에 빈소를 차렸다. 영정사진은 공연 중 촬영사진으로 대신했다. 5일장을 거쳐 25일 화장한 후, 유골은 고향 인천 바다에 뿌렸다.

지난해 바다장을 치른 곳이 바로 17번 부표 앞이었다. 낮 12시11분. 푸른바다호는 1년이 지나 다시 17번 부표 앞에 도착했다. 녹색 부표엔 갈매기 너댓 마리가 쉬고 있었다. 지난해 바다 장에도 그랬지만 17번 부표는 도심 한복판의 신호등 같았다.

인천대교가 여전히 바다 한 면을 가로막고 있었고, 대형 컨테이너선이 느리지만 위협적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장례지도사가 흰 국화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꺼내왔다. 한 사람에 하나씩 국화를 손에 들었다.

추모 시간은 길지 않았다. "지금부터 10분간 정지하겠습니다. 유족들께선 고인과의 추억을 나누시기 바랍니다"라는 선장의 안내방송으로 흘렀다. 사람들이 17번 부표가 보이는 쪽으로 몰리자 배가 쑥 기울었다. 바다에 던질 거라곤 흰 국화와 소주 몇 잔이 전부였다.

고인은 자신을 무연고자로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고인이 어릴 때 소식이 끊겼고, 아버지는 대학 입학하기 전에 돌아가셨다. 극단 동료들이 사재를 털어 서울좋은병원 장례식장에 빈소를 차렸다. 이런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이 불우했던 배우의 마지막에 관심을 보였다.

언론 보도가 이어지면서 미국에서 연락이 왔다. 이민을 떠나면서 소식을 끊긴 양어머니였다. 그녀는 일흔셋이 넘은 고령임에도 기사를 접하자마자 바로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시간이 문제였다. 바다를 건너 인천공항에 도착했지만, 연안부두 터미널에 도착하려면 입국 과정으로 시간이 걸렸다.

푸른바다호는 바다장에 참석하려는 양어머니를 무작정 기다릴 수 없었다. 장례지도사와 푸른바다호 선장은 배가 더 지체하면 출항허가를 못 받는다고 했다. "택시 타고 밟으면 30분이면 도착해요. 그때까지만 기다려 줘요" 인천공항으로 양어머니를 마중 나간 고인의 친구들이 전화기를 붙잡고 호소했다.

바다 건너서 어머니가 왔는데 배를 띄우면 안 된다고 사정했다. 결국 장례 비용이 문제였다. 동료들이 모은 사재와 조의금, 연극인복지재단 등에서 지원받은 돈으로 겨우 장례비를 마련했지만, 다음 날 배를 다시 띄울 비용까지는 추가로 마련할 여력이 없었다.

누군가는 결정해야 할 문제였으나 아무도 결정하지 못하고 고개만 숙였다. 선장과 장례지도사는 시계를 자꾸 봤다. 수화기 너머의 호소는 울부짖음으로 바뀌었고, 결국 욕설로 변했다. 그렇게 겨우겨우 푸른바다호는 17번 부표로 바다장을 치르러 출항할 수 있었다.

"유족 여러분. 마지막으로 기적 3번 울리고 떠나겠습니다." 추도식을 끝을 알리는 선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복을 입은 사람들을 가득 태운 선박이 다른 부표를 향해 멀리서 지나갔다. 푸른바다호는 17번 부표에서 멀어졌다. 추도식 참석자들은 뭍에 도착하자 선착장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지난해 장례식에선 아무도 사진을 찍지 않았다. 대신 뭍에 도착해서 서울로 바로 출발하지 않고 양어머니를 기다렸다. 30여 분을 기다리자 양어머니가 도착했다. 그는 장례 버스에 올라와서 문상객들의 손을 하나씩 마주 잡으며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손을 마주 잡은 이들은 간신히 참았던 눈물을 다시 흘렸다.

1주기 추모식에 참가한 이들은 연안부두 터미널 근처 밴댕이 회무침 골목으로 찾아갔다. 밴댕이 회무침은 고인이 평소 맛있다고 자랑한 고향 음식이다. 한 참석자는 "이 맛있는 걸 두고 밴댕이처럼 왜 먼저 떠나냐"고 괜한 원망을 쏟아냈다. 배우들은 '인간동물원초'를 원래 출연했던 멤버 그대로 다시 공연하자고 다짐했다.

식사를 마친 배우들은 '혜화동1번지' 동인이 주최하고 세월호 변호사로 잘 알려진 박주민 의원이 '참사 이후의 법제화'라는 주제로 강연하는 무료 워크숍에서 참석하기 위해 서둘러 서울로 다시 떠났다. 이 워크숍은 올 가을에 '세월호'를 주제로 열리는 연극 축제를 위한 사전 행사였다. 그렇게 고인이 못다 한 연극은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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