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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도 불황도 '열정도' 못막는다…청년장사꾼 한자리에

도심 한복판 낯선 '섬'…청년들 꿈 모인 '명소'로

[편집자주]

12일 오후 서울 용산구 열정도 쭈꾸미 가게 앞에서 직원이 쭈꾸미를 굽고 있다. 열정도는 용산 재개발이 진행되면서 생긴 고층 건물들 사이 방치된 골목이었지만 청년창업가들을 만나 에너지 넘치는 곳으로 탈바꿈했다. 열정도의 모든 매장은 월~토요일 17 ~ 24시까지 이용 가능하다. 2016.8.12/뉴스1 © News1 허예슬 인턴기자


흔히 섬이라 하면 사방이 물로 둘러싸인 지역을 의미한다. 그런데 아파트 숲으로 둘러싸인 도심 한 가운데 섬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이름도 특이한 그곳은 '열정도(島)'다.

열정도는 청년들이 하나 둘씩 모여 상권을 만든 지역이다. '열정'이 가득하다는 뜻과 도시와 왠지 동떨어졌다는 의미에서 '섬'이 붙어 열정도가 탄생했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여름에도 열정도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열정도의 청년들은 더욱 분주하게 움직였다.

전국에 폭염 특보가 내려진 12일 저녁 직접 열정도를 찾았다.

"어서 오십쇼."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자 우렁찬 목소리가 손님을 반긴다. 열정도 끝부분에 위치한 '열정도 고깃집'에서 일하는 청년들이다. 손님 가득한 고기집 안에는 불판에서 연신 땀을 닦는 장준화씨(27)가 있었다.

장씨는 지난해 7월 중순 열정도로 들어와 고깃집에서 일했다. 대학 ROTC 출신의 장씨는 전역 후 열정도에 있는 청년들이 즐겁게 일하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됐다. 그리고 "아 나도 여기서 일하면 재미있게 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찜통 더위에 장씨가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초벌구이'다. 오후 5시30분에 가게를 오픈하면 그때부터 주문이 들어오는 대로 고기를 초벌해 손님상에 올린다. 초벌은 짧게는 1~2분, 길게는 5~10분을 한다.

그렇게 오전 12시 가게를 닫을 때까지 불과의 사투는 계속된다. 불판에서 흐르는 땀을 닦고 있으면 시원한 이온음료가 그리울 지경이다.

장씨는 "요즘 같이 더운 날이 가장 힘들다. 그래도 다른 청년들과 자주 교대도 하고 손님들과 신나게 웃고 떠들다 보면 시간이 잘 간다. 땀도 많이 나지만 즐겁게 일해 괜찮다"고 웃으며 말했다.

열정도에는 장씨 같은 20~30대 청년들이 수두룩하다. 열정도는 30대 청년 두 명의 '열정도 프로젝트'로 탄생했다.

프로젝트를 기획한 김윤규(30)·김연석(35) 청년장사꾼 대표는 애초 서울 경복궁 인근 등에 조그마한 감자집을 운영해 성공시켰다. 이후 새로운 장사를 시작하려고 장소를 모색하는 중 지금의 열정도 부지를 발견했다.

열정도는 서울 지하철 1호선 남영역 인근인 용산구 원효로 1가에 위치해 있다. 그동안 이곳에서 진행된 도심 재개발로 용산 KCC 웰츠타워아파트, 이안용산아파트, 이안용산프리미어 등 고층 주상복합아파트가 우뚝 세워졌지만, 이 한가운데 위치한 열정도 부지는 옛 모습 그대로 남았다. 애매한 부지 위치 탓에 인근에서 갑자기 오른 땅값으로 수익성이 떨어져 재개발이 중단된 것이다.

애초 열정도 부지는 인쇄소와 공장 등이 있는 인쇄골목이었다. 지금도 그대로인 한 옛 건물에는 '안전제일'이 써진 간판이 달려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인쇄소는 장사를 접거나 파주출판도시로 이전했다. 그나마 왁자지껄했던 인쇄골목은 사람이 빠져 휑한, 그야말로 을씨년스러운 거리가 됐다.

화려한 거리보다 특색 있는 거리를 찾던 두 명의 청년장사꾼 대표는 2014년 11월 장사를 하고자 하는 청년들을 모아 감자집, 고기집, 쭈꾸미집 등 6개의 음식점을 한꺼번에 오픈하며 거리를 다시 살려냈다. 현재 열정도에 들어선 가게는 더욱 늘어나 10개 남짓에 달하고 있다. 

12일 오후 서울 용산구 열정도고깃집 앞에서 직원들과 손님들이 올림픽 시즌을 맞이하여 진행되는 열정도 올림픽을 즐기고 있다. 열정도는 용산 재개발이 진행되면서 생긴 고층 건물들 사이 방치된 골목이었지만 청년창업가들을 만나 에너지 넘치는 곳으로 탈바꿈했다. 열정도의 모든 매장은 월~토요일 17 ~ 24시까지 이용 가능하다. 2016.8.12/뉴스1 © News1 허예슬 인턴기자


◇장사를 즐기는 청년들 "열정을 만나면 정열이 솟는다"

200m 남짓한 열정도 메인 거리에 위치한 가게들은 저마다 개성이 뚜렷하다. 특히 거리 중간쯤에 위치한 '열정도 쭈꾸미'에는 화려한 간판 대신 '쭈꾸미 팔아 장가가자', '열정을 만나면 정열이 솟는다' 등이 삐뚤빼뚤하게 쓰여 있다.

가게 안팎에도 '성실이 답이다', '저기압일 땐 고기 앞으로' 등 재치 있는 문구가 가득했다. 최대한 인테리어를 자제하고 옛 건물 그대로의 허름한 멋을 살린 게 열정도 가게들의 특성이다.

쭈꾸미 역시 초벌구이를 하기에 직원들도 가게 문을 들락날락하며 분주했다. 한 직원은 "오후 6시쯤 문을 열면 그 전부터 불을 준비해놔야 한다. 더위를 느낄 새도 없이 굉장히 정신 없다"면서도 "저 현수막에 있는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낫지 않느냐"며 웃어보였다. 현수막에는 가게를 소개하며 한 방송에 출연한 직원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열정도의 청년 점주들은 익살스러움이 가득했다. '열정도 감자집'에서 일하는 청년들의 티셔츠 뒤에는 '감자 살래, 나랑 살래', '크게 될 놈, 뭘 해도 될 놈'라는 문구가 쓰여 있어 손님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고깃집에서 일하는 또 다른 직원은 처음보는 기자에게 "형님이라고 부를게요. 제가 어려보이니까"라며 농담을 건넸다. 직원의 머리에는 꽃 모양의 관이 쓰여 있었다. 직원은 기자에게 '올림픽 종목'을 하지 않겠느냐며 조그마한 공을 건네기도 했다.

열정도에서는 2016년 리우올림픽을 기념해 각 가게마다 미니 올림픽을 개최하는 등 이벤트를 기획하는 등 아이디어를 냈다. 고깃집에서는 '미니 농구', 쭈꾸미집에서는 '머리에 공 올리기', 와인집인 철인28호에서는 '미니양궁'을 하는 식이다.

일주일에 한두번씩 열정도에 온다는 직장인 김상은씨(31 여)는 "가끔 밥을 먹다가 심심하면 올림픽에 참여하곤 하는데 쉽진 않다"며 "열정도에는 항상 에너지가 넘친다. 청년들이 이렇게 활기차게 일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 신기하다"라고 즐거워했다.  

고깃집에서 일하는 장준화씨는 "올림픽에서 1등하는 손님은 메뉴를 자유롭게 고를 수 있다"며 "열정도에는 즐거움이 있다. 재미있게 일하는 청년들이 많고 손님들과 자주 소통할 수 있는 게 큰 매력"이라고 말했다.

12일 오후 서울 용산구 열정도 골목을 찾은 사람이 치킨 집 앞을 지나고 있다. 열정도는 용산 재개발이 진행되면서 생긴 고층 건물들 사이 방치된 골목이었지만 청년창업가들을 만나 에너지 넘치는 곳으로 탈바꿈했다. 열정도의 모든 매장은 월~토요일 17 ~ 24시까지 이용 가능하다. 2016.8.12/뉴스1 © News1 허예슬 인턴기자


◇폭염 이기는 열정…열대야도 '무색' 

밤이 깊어지자 사람들은 열정도에 점점 더 모여들었다.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열정도로 나름 피서를 온 사람들도 있었다.

직장인 권나예씨(29 여)는 "날씨가 덥긴 하지만 이곳에보다는 열정이 느껴져서 좋다. 직원들도 과도하게 친절해 금방 친해질 것 같다"며 "열대야도 이길 겸 거리를 두 바퀴 정도 돌다가 감자집에서 맥주 한잔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열정도는 이곳에서 오랫동안 지낸 인근 주민들의 표정도 바꿔 놓고 있다. 이곳에서 살면서 20년 넘게 슈퍼를 운영한 한 50대 사장은 "인쇄소 골목이 사라졌을 때 거리가 모두 어두컴컴해서 길고양이가 거의 하루 종일 울었다"며 "지금은 청년들이 왁자지껄하니 그런 것도 사라지고 참 신기하긴 하지만, 요즘 같은 불경기에 장사가 잘 되어야 할텐데…"라며 걱정을 하기도 했다.

막상 열정도의 청년들은 불경기를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다. 장사를 시작하고 운영하는 게 어렵긴 하지만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즐겁게 할 수 있다면 이겨낼 수 있다는 분위기다.

장준화씨는 "처음에 열정도에 들어오면 사업에 대한 교육을 2주가량 진행한다. 교육하면서 동기도 만나고 많은 노하우를 얻을 수 있어 두려워 하는 청년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다"라고 말했다.

열정도는 매월 둘째 주 토요일 저녁이면 야시장이 들어서기도 한다. 수공예품을 사와 직접 내다 팔기도 하고 문화 공연을 개최하는 등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많으면 4000~5000명의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한다고 한다. 

죽어가는 거리를 살리고 사람을 모으고 문화를 만드는 청년들의 움직임은 폭염에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열정도 거리 한켠에 세워진 설치물에는 "열정도로 오세요. '열정'도 드립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 뒤로 "어서 오십시오"라고 외치는 청년들의 목소리가 한밤 중에도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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