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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보정리뷰] 일그러진 시절에 끼워 맞춘 자기 변명…연극 '1945'

[편집자주]

연극 '1945' 공연장면 (사진=국립극단)
연극 '1945' 공연장면 (사진=국립극단)

친일 행적을 감추고픈 미당 서정주가 쓴 아름다운 시를 낭송하는 기분이랄까. 아니면 월북한 아버지와 정반대의 정치 성향을 보인 소설가 이문열이 펴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완독한 느낌이랄까. 이런 불편함 때문에 연극 '1945'를 관람한 이후 박수 한 번을 치지 않고 서둘러 극장 밖으로 빠져나와야 했다.

지난 5일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한 이 작품은 만주에서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려는 조선인들의 애환과 갈등을 담았다. '2017년 최고의 수작' '배삼식 작가의 마법' '현재 세대 격차·이념 갈등을 은유' 등 언론과 평단의 격찬을 받으며 성황리에 공연하고 있다.

호평의 중심에는 극작가 배삼식이 있다. 국립극단은 공연에 맞춰 '1945' 희곡집 1000부를 펴냈는데, 공연마다 50여 권씩 판매돼 추가 인쇄까지 고려하고 있다. 희곡집이 매진되는 경우가 이례적인 일인 만큼 관객의 평가도 호의적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배 작가는 김윤철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취임 후 줄기차게 표방한 '한국인의 정체성'을 화두로 삼아 '1945'를 썼다. 작가에 따르면 해방은 지금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의 근원임에도 현재 우리는 해방을 추상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해방 직후 만주의 조선인 전재민(戰災民) 구제소를 작품의 무대로 삼았다.

만주 전재민 수용소에 있는 조선인은 해방이 되자 고향으로 돌아갈 열차를 타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다. 만주국은 1931년 9월 일본 관동군이 일으킨 '만주사변'으로 급조됐으나 1945년 갑자기 붕괴했다. 당시 만주에 살았던 조선인은 200만 명으로 추산된다. 작가는 조선인 200만 명을 15명으로 압축시켰고, 이 과정에서 독립투사는 집안을 몰락시킨 원흉으로만 회상될 뿐 직접 출연하지 않는다.

작품의 긴장감은 열차를 타고 못 타느냐는 기준에서 발생한다. 세상이 바뀌자 일본인과 친일 부역자의 처지는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일본인도 국적을 속이거나 뇌물을 주면서까지 열차를 타보려 시도하지만 발각돼 몰매를 맞아야 했다. 친일 부역자도 열차를 못 타는 것은 일본인과 마찬가지다.

만주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갔던 이명숙(김정민)은 등장인물 15명의 중심에 있다. 그에겐 비밀이 하나 있다. 그의 임신한 벙어리 여동생이 사실 위안소에서 함께 생사를 넘나들었던 일본인 미즈코(이애린)였던 것이다. 비밀이 탄로 날 경우 열차를 못 타는 것은 물론이며 조선인들에게 맞아 죽을 각오도 해야 한다. 이들이 가까스로 도착한 전재민 구제소에는 혼자 도망친 조선인 포주 박선녀(김정은)도 끼어 있어서 긴장감을 더한다.

작품 속 조선인들은 일제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친일부역자다. 이들은 이기주의적 행동과 인간적 행동을 번갈아 보여주면서 인간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나약한 존재인지를 드러낸다. 예를 들어, 이명숙과 미즈코를 악랄하게 괴롭혔던 박선녀는 괴질에 걸린 남편 장수봉을 헌신적으로 간호한다.

작가는 한 명의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측면을 드러내면서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느냐'고 오늘날의 관객에게 묻고 있다. 그는 일제 강점기가 조선인들이 겪어야 했던 '더러운 진창이자 지옥'이라고 규정한다. 이어 해방이 됐다고 진창에서 남들보다 더 새까맣게 그을린 것(친일부역)을 개인의 잘못으로 몰아 처단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이런 작가의 가치관은 극 중 지식인인 구원창(백익남)의 대사 "결국은 같이 살 수밖에 없고, 같이 살아야 하는데"로도 드러난다.

이런 작가의 세계관은 이명숙과 벙어리 여동생의 신분이 발각되는 장면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미즈코를 구하려는 이명숙의 인간적 행동이 '친일 청산'이란 가치 판단 앞에서 억울하게 배척받는다. 전재민 구제소의 조선인들은 절대로 열차에 함께 탈 수 없다며 이들에게 침을 뱉기도 한다. 작가는 고향에 돌아가려고 이명수과 미즈코를 배척하는 조선인들의 행동이 일제 강점기때 살아남으려고 부역했던 행동과 차이가 없다고 말하려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 장면은 위안부 강제 징집 이력이 친일부역 중 하나로 읽힐 수 있는 오류의 위험성이 있다. 위안부 문제가 친일부역자들의 자기변명 논리를 증명하는 사례로 쓰였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되새겨도 씁쓸함을 자아낸다. 또한 위안부에 대한 조선인들의 부정적 반응이 친일 부역에 대한 거부반응이 아니라 가부장적인 유교문화에 의해 학습된 것이라는 점도 짚어보아야 할 부분이다.

작가는 연극 '1945'와 관련된 언론 인터뷰에서 '과거는 현재를 바라보는 창'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이 연극은 국정농단 사태를 겪은 우리 시대의 갈등을 은유하는 작품으로도 읽힌다.

동시대 예술가 1만 명이 창작의 자유를 제한받은 '더러운 진창'에 빠졌던 시절에 작가가 자유롭게 창작의 혼을 담은 신작을 내놓을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다른 한편으로 이 작품은 하수상한 시절에 한국인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탐구한 '김윤철 국립극단 예술감독 체제에서의 미학적 완성'이라고 불려도 좋을 것이다.

30일까지. 서울 중구 명동 명동예술극장. 입장료 2만~5만원. 문의 1644-2003.

연극 '1945' 공연장면 (사진=국립극단)
연극 '1945' 공연장면 (사진=국립극단)


연극 '1945' 공연장면 (사진=국립극단)
연극 '1945' 공연장면 (사진=국립극단)


연극 '1945' 공연장면 (사진=국립극단)
연극 '1945' 공연장면 (사진=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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