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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판결 8년만에 '존엄사법 시행'…당시 쟁점은?

"무의미 연명치료, 이미 시작된 죽음의 연장에 불과"
"환자 뜻 객관 추정 어려워" "자살 허용하는 셈" 등 소수의견도

[편집자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전경. © News1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전경. © News1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들의 존엄사를 허용하는 연명(延命)의료결정법 시행이 2018년 2월로 다가오면서 존엄사를 허용한 과거 대법원 판결이 다시 조명받고 있다.

23일 법조계에 따르면 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담론은 1997년 보라매병원 사건 이후 본격화했다. 식물인간 상태인 환자의 퇴원을 요구한 부인과 퇴원을 허락한 병원 의사가 살인방조 혐의로 유죄를 확정받은 것이다. 치료 포기가 병원과 환자가족에 대한 형법상 처벌로까지 이어지자 죽음에 이를 때까지 치료하는 의료관행이 보편화됐고, 환자가족 등을 중심으로 존엄사를 인정해야 한다는 요구가 터져나왔다.

존엄사가 법적으로 인정된 것은 이용훈 대법원장 시절인 2009년 5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서다. 대법원은 "회복 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에 이른 환자가 인간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에 기초해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 연명치료의 중단이 허용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후에도 긴 논쟁을 낳았던 존엄사 문제는 우여곡절 끝에 연명의료결정법(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 제정이라는 성과를 낳았다. 법은 담당의사와 해당분야 전문의 1명으로부터 임종과정에 있다는 의학적 판단을 받은 환자에 대해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항암제, 인공호흡기 착용의 연명의료를 시행하지 않거나 중단하는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이날부터 전국 10개 의료기관에서 시범사업을 시행한다. 대법원 판결 이후 8년만에 존엄사가 가능해진 것이다. 다만 헌법상의 모든 기본권의 전제가 되는 생명권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존엄사를 둘러싼 찬반논쟁은 여전히 뜨거운 상황이다.

◇"무의미한 연명치료, 인위적 신체 침해"…자기결정권 등 존엄사 요건 제시

식물인간 상태였던 환자 김모(당시 77세)씨의 가족들은 지난 2008년 2월 김씨의 치료 가능성이 사라지고 의료기기에 의존해 연명해야 하는 상태가 되자 "김씨가 평소에 '정갈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하길 원했다"며 입원 중이던 세브란스병원에 치료중단을 요청했다. 병원이 생명유지 의무를 이유로 반대하자 소송으로 이어졌고, 1,2심과 대법원은 환자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고 원고승소를 판결했다.

대법원은 "환자가 회복 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에 진입한 경우 전적으로 기계적인 장치에 의해 연명하게 되고, 의학적인 의미에서는 치료의 목적을 상실한 신체침해 행위가 계속적으로 이뤄지는 것"이라며 "이는 죽음의 과정이 시작되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는 이미 시작된 죽음의 과정에서의 종기(終期)를 인위적으로 연장시키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신체침해 행위에 해당하는 연명치료를 환자에게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해하게 한다"며 "환자의 의사결정을 존중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을 보호하는 것이 사회 상규에 부합되고, 헌법정신에도 어긋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대법원은 존엄사 인정을 위한 요건으로 4가지를 제시했다.

우선 대법원은 △의학적으로 환자의 의식회복 가능성이 없고 △생명과 관련한 중요 생체기능의 상실을 회복할 수 없으며 △신체 상태에 비춰 짧은 시간 내에 사망이 이를 수 있음이 명백한 경우를 '회복 불가능한 사망의 단계'로 보고, 이 경우 연명치료를 포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이 단계에서 이뤄지는 진료행위(연명치료)는 원인이 되는 질병의 호전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호전을 사실상 포기한 상태에서 오로지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이뤄지는 치료에 불과하므로, 그에 이르지 않은 경우와는 다른 기준으로 진료중단 허용 가능성을 판단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 대법원은 이같은 경우에 대비해 환자가 미리 의료인에게 자신의 연명치료 거부·중단 의사를 밝혔다면 자기결정권을 행사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고 봤다. 다만 이같은 사전의료지시가 없었다면 환자의 평소 가치관이나 신념 등에 비춰 연명치료 중단이 객관적으로 환자의 최선 이익에 부합된다고 인정돼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밖에도 대법원은 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환자가 회복 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에 이르렀는지를 판단할 때에는 전문의사 등으로 구성된 위원회 등의 판단을 거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환자 뜻 추정 객관성 필요" "자살을 허용하는 셈" 등 소수의견도

당시 전원합의체는 9대4 의견으로 이같은 결론을 냈다. 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논쟁처럼 대법관들의 의견도 엇갈렸던 것이다. 당시 판결문에는 2개의 반대의견과, 반대의견에 대한 재반박(별개의견)도 함께 담겼다.

안대희·양창수 대법관은 김씨의 연명치료 중단의사가 객관적으로 추정될 수 없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망인의 가족들은 △김씨가 팔에 상처가 생긴 이후, 이를 남에게 보이기 싫어해 여름에도 긴 소매 옷을 입은 점 △과거 병석에 누워 있는 이들을 보며 "저렇게까지 남에게 누를 끼치며 살고 싶지 않다. 깨끗이 이생을 떠나고 싶다"고 말했던 점 △남편 임종 당시 "내가 안 좋은 일로 소생하기 힘들 때 호흡기는 끼우지 말라. 기계에 의해 연명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고 한 점 등을 근거로 내세웠다.

이에 대해 안 대법관 등은 "연명치료의 중단을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의해 정당화하는 한, '추정적 의사(意思)'란 환자의 뜻이 객관적 정황으로부터 추단될 수 있는 경우에만 긍정될 수 있다"며 망자의 과거 행동과 발언은 "건강한 상태에서는 누구라도 흔히 할 수 있는 정도의 행동과 발언에 불과하다"고 봤다.

또한 김씨가 회복 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에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안 대법관 등은 "담당 주치의의 의견은 그가 소송당사자의 일방에 속해 일하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다른 전문가와 비교해 일정한 무게를 두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홍훈·김능환 대법관은 치료할 수 없더라도 연명이 가능하다면 존엄사를 인정할 수 없다며 반대의견을 냈다. 이 대법관 등은 "생명에 직결되는 진료에서 환자의 자기결정권은 소극적으로 그 진료·치료를 거부하는 방법으로는 행사될 수 있어도, 이미 환자의 신체에 삽입, 장착된 인공호흡기 등의 생명유지장치를 제거하는 방법과 같이 적극적인 방법으로 행사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 대법관 등은 "자기결정권도 헌법질서를 위반하지 않는 범위에서만 보호받을 수 있는 내재적 한계가 있고, 자살의 경우와 같이 자기 생명을 자유롭게 처분하는 것은 헌법상 자기결정권의 한계를 벗어나 허용될 수 없다"며 "생명유지장치가 삽입, 장착된 상태에서도 몇시간 또는 며칠에 사망할 것으로 예측·판단되는 경우에만 치료 중단이 허용된다"고 덧붙였다.

김지형·차한성 대법관은 보충의견을 통해 이들의 의견을 재반박했다. 김 대법관 등은 "시간적 근접성만을 기준으로 이전 단계에서는 치료장치의 제거를 자살이라 하면서도, 이후 단계에서는 생명침해에 해당하지 아니한다고 보는 것은 살인이나 자살에 관한 일반적 법리에 어긋난다"며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은, 인위적으로 생명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위적인 신체침해 행위에서 벗어나 환자의 생명을 환자 자신의 자연적인 신체 상태에 맡기도록 하는 것으로, 이를 자살로 평가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한편 전원합의체는 △소부 대법관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소수의 의견이 나오거나 △종전에 대법원에서 판시한 헌법·법률·명령 또는 규칙의 해석적용에 관한 의견을 변경할 필요가 있을 경우, 대법원장, 대법관 12명 등 총 13명이 판결하는 것이다. 주로 정치·사회적으로 논란이 있는 파급력이 큰 사건들에 대해 진행되며, 과반수의 찬성으로 결론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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