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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숙하고 따뜻한 시선…고도성장기 경제엘리트의 회고

신간 '금융인 安承喆 회고수상록 배움, 이룸, 바람' 리뷰

[편집자주]

금융인 安承喆 회고수상록 표지 © News1

모든 개인의 역사는 세계사라는 얘기가 있는데 여기에 딱 들어맞는 책이다.

고도성장기 한국을 이끌어온 금융인 중 한 명인 안승철(83) 전 중소기업은행장의 자서전은 격동의 20세기 한국과 세계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이 그랬듯 저자의 삶도 가난하고 힘들었던 대한민국의 숱한 곡절과 연결되어 있다.

저자는 그렇게 고단했던 발자취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뒤돌아 본다. 주요 직책에 있으면서 겪었을 고뇌와 번민, 갈등 등을 자서전에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저자는 책 곳곳에서 큰 깨달음을 주거나 기회와 사랑을 주었던 초등학교 은사 이수재 선생, 서병수 전 산업은행 총재, 신병현 전 부총리 등 여러 인사들에게 감사함을 밝힐 뿐이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고마움으로 인생을 마무리 지으려는 달관이 묻어 있다. 손주들에게 남기는 할아버지의 이야기 같다.  

이는 자서전을 쓴 시기와 연관이 있을 듯하다. 완숙한 연륜에 이르면서 그간의 번민과 갈등은 적절하게 여과됐을 것이다. 

저자는 "한평생을 산다는 것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 인연을 맺으며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되돌아보니 모두가 그립고 고마운 분들이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20세기 후반 한국 금융계를 이끌어온 엘리트의 삶을 살았다. 

1935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난 저자는 마산상고, 서울대 상대를 거쳐 한국은행에서 금융인 생활을 시작한다.

한국은행을 다니다 미국 버클리대로 유학을 떠나 박사학위를 받은 후 한국은행으로 복귀해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중소기업은행장,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인천재능대 총장 등을 지냈다. 

저자는 지난 시기를 셋으로 나눠 얘기한다.

먼저 함안 칠서면의 도갓집 아들로 태어나 마음껏 뛰놀던 칠서국민학교 시절, 지역 인재들이 모여 꿈을 키우던 마산상고 시절, 서울대 상대, 한국은행 입사, 결혼, 결혼 후 유학 시절 등을 '배움과 준비'의 시기로 구분했다.

저자는 금수저는 아니더라도 '은수저'로 태어나 큰 걱정없이 성장기를 보낸데 대해 부모님과 가족에 감사를 전한다.

이 시절 언어장벽에 부딪치는 미국 유학 첫해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린 대목이 인상적이다. 1인당 GNP 100달러 안팎의 극빈국 지식인으로서, 가족 친지들의 성원을 한몸에 받으면서 짊어졌을 정신적 부담과 고통이 대단했을 것이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도 담담하게 서술한다.

경제학 박사학위를 따고 잠시 미국 대학 교수로 있던 저자는 귀국해 13년동안 한국은행에서 일한 뒤 KDI원장(1983~1986), 신용보증기금이사장(86~88), 중소기업은행장(88~91) 국민은행 이사장(92~94) 금융통화위원(96~98) 등으로 금융인으로서 전성기를 맞는다. 도약과 성취의 시절이었다.  

KDI원장으로 있으며 국민연금 도입을 위한 선도적 연구를 진행했고, 중소기업은행장 재직시엔 은행 규모를 크게 키워 중소기업 지원의 탄탄한 기반을 닦는 등의 여러 업적을 남긴다. 

회고록엔 당시 사정이 자세히 적혀 있어 관련 연구에도 적잖은 도움을 줄 듯하다. 또 이 시기 저자와 교류했던 남덕우, 신병현 등 기라성 같은 경제계 인사들의 족적들도 스쳐지나고 있어 흥미롭다. 

저자는 마지막 3부에서 노년의 삶을 회고하고 후대와 후학들에게 몇가지를 당부한다.

저자는 건강, 경제적 여유, 홀로서기 준비 등을 성공적 노년의 조건으로 꼽고 현재에도 행복을 주는 일본 기차여행, 골프, 산행, 외국어 공부 등을 예찬한다. 

자서전을 마무리하는 대목에선 부인 하영주 여사에게 각별한 사랑을 전하고, 2남 1녀 자녀와 손주들에게 따뜻한 메시지를 남긴다. 함께 노년을 보내고 있는 형 승우씨, 동생 승복씨, 친지, 벗들에게도 일일이 감사를 전한다. 

또한 자신이 겪었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과 그들의 시대를 넉넉한 시선으로 간략히 평가한다.

그러면서 후배 세대들에게 교육개혁을 이루고, 나라 빚을 떠넘기지 않은 전통을 지켜달라는 부탁을 하면서 정치선진화와 글로벌화를 바탕으로 문학과 철학의 소양을 갖춘 한국인들이 세계를 누비는 모습이 한국이 나아갈 방향이 아니겠는가 라고 조언한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먼저 떠오른 생각은 '자서전의 모범 같다'는 것이다. 물 흐르듯 과거를 돌아봤고, 목적과 성취 대신에 함께 만났던 이들을 소중히 다뤘다. 

당초 전량 비매품으로 출간해 지인들에게만 선물할 생각으로 집필했다는 저자의 질박한 접근이 이런 결과를 낳은 것 같다.

저자는 "우리 사회는 어느날 갑자기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세대가 바뀌고 이어지면서 연속적으로 진화 발전하는 역사적 산물"이라며 "우리 세대가 몸으로 겪어 온 대한민국 현대사를 생생히 알려줌으로써 다음세대가 더 잘 사는 미래를 만드는데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맺는다.

식민지에서 태어나 포연 속에서 공부하고 가난 속에서 고도성장을 이룬 세대들의 마음이 이럴 것이다.

◇금융인 安承喆 회고수상록 배움, 이룸, 바람/ 안승철 지음/ 기파랑 / 2만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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