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공유하기

머리카락 굵기 안에 600층 겹쌓는 MLCC를 아시나요?

'전자산업의 쌀' 수확하는 삼성전기 부산공장
자동차 전장용 MLCC로 세계 1위 쫓는다

[편집자주]

삼성전기 MLCC 생산설비에서 작업자가 일하고 있다 © 뉴스1
삼성전기 MLCC 생산설비에서 작업자가 일하고 있다 © 뉴스1

"도자기를 굽는 것 같다."

'적층세라믹캐패시터(Multi-Layer Ceramic Capacitor, MLCC)'. 이름도 생소한 이 전자 장비의 생산 공정을 돌아보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생각입니다. 삼성전기의 부산공장. 내부가 열로 붉게 달궈진 기계 안에서 '소성'(燒成) 작업을 거치고 있는 MLCC와 그 안을 바라보는 작업자들의 모습은 흡사 가마 안의 도자기를 바라보는 도공들의 모습과 같아 보였습니다. 공장 관계자는 "소성 공정이 생산 과정에서 가장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작업"이라고 말했습니다.

일반 소비자들에게는 낯설지만 MLCC는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전자 기기에 탑재되는 부품입니다. 외부에서 공급되는 전기를 저장했다가 반도체 등 능동부품이 필요한 만큼 적당량을 공급해 주는 '댐'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사실 현대인들이 늘 사용하는 스마트폰에만 1000여개의 가까운 MLCC가 들어갑니다. TV(2000개), 전기자동차(1만여개) 등 전자회로가 들어가는 대부분의 제품에도 사용되고요. 그래서 전자업계에서는 MLCC를 '전자산업의 쌀'이라고도 부릅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주 쓰이면서도 우리가 MLCC를 쉽게 볼 수 없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일단 전자 장비를 해체해볼 일이 거의 없거니와 MLCC의 크기가 너무 작기 때문입니다. 스마트폰의 탑재되는 IT(정보통신)용 MLCC는 가로·세로 0.2㎜에 높이 0.4㎜로 머리카락보다 그 굵기보다 가늡니다. 전자산업의 쌀이라고 불리지만 실제 쌀알과 크기를 비교했을 때 250분의 1도 안되는 크기죠. 무게도 0.001㎎ 이하로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는 모래 알갱이 같아 보입니다.

삼성전기의 MLCC와 쌀알을 크기 비교(삼성전기 제공) © 뉴스1
삼성전기의 MLCC와 쌀알을 크기 비교(삼성전기 제공) © 뉴스1

하지만 MLCC는 작다고 무시할 수는 없는 장비입니다. 맨눈으로 잘 보이지도 않는 이 장비는 안에는 전기를 저장할 수 있도록 유전체와 전극이 600층이 넘게 촘촘히 쌓여 있습니다. 바로 이 층들 사이에 전기가 저장되는 거죠. 크기는 작으면서 저장하는 전기 용량을 크게 만들어야 경쟁력을 갖출 수 있기 때문에 원료를 미립화하고 이를 균일하게 층으로 쌓을 수 있는 제조 기술이 필요합니다. 반도체가 '나노' 기술 단계에서 높은 기술적 진입장벽을 갖추고 있다면 '마이크로 기술 단계에서는 MLCC가 그 위치에 해당한다고 보면 됩니다.

삼성전기는 국내에서 이 MLCC를 생산해 글로벌 2위의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는 기업입니다. 지난 13일 뉴스1은 부산 강서구에 위치한 삼성전기 부산사업장을 찾아 전자산업의 쌀이 재배되고 수확되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삼성전기가 MLCC 생산의 완전 자동화를 추구하고 공정별로 조밀하게 밀집된 기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미세한 제품을 다루고 있기에 생산용 기계들은 반듯하게 네모진 외관 만큼 정밀하게 제품을 인쇄하고, 압착하고 자르고 구워내고 있었습니다. 작은 먼지의 유입도 불량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초기 공정 일부는 '클린룸'에서 이뤄지는 것도 눈에 띄었습니다.  

MLCC의 제조 공정은 가루 형태로 되어 있는 원료들을 섞어 걸쭉한 액체괴물 형태의 '슬러리'(slurry)를 만들고 이를 투명 필름 위에 얇은 시트 형태로 코팅하는 과정부터 시작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세라믹 시트 위에 내부 전극을 인쇄하는데요. 이렇게 인쇄된 시트를 1개 층으로 해서 수백층까지 쌓아 올리고 필요한 크기로 잘라 도자기를 굽듯이 열처리 공정을 거치면 MLCC가 생산됩니다. 다른 종류의 캐패시터(축전기)에 비해 공정이 단순하지만 원료를 혼합하는 것부터 시작해 제품을 가공해 포장하는 데까지 모두 16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제조 공정을 전부 거치는데 짧게는 28일(IT용)에서 길게는 43일(전장용)이 걸립니다.

작은 크기와 많은 전기 저장량을 갖추는 것이 경쟁력의 핵심인 만큼, MLCC 제조사들은 최대한 원료들을 얇게 펴 층수를 높이는데 역량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얇은 층을 만들기 위해서는 원료를 더 작게 미립화하는 노력이 필요한데요. 삼성전기는 원료 제조 기술을 높이고 불량률을 낮추기 위해 직접 원료를 생산하는 '내재화' 전략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런 전략 덕분에 삼성전기는 현재 대부분의 원료를 직접 만들어 내고 있답니다. 더욱이 최근에 MLCC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원료를 저장할 수 있는 '원료동'을 2개에서 3개로 늘리는 공사를 진행 중입니다. 내년 상반기 새로운 원료동이 가동되면 삼성전기의 원료 자급률은 더 높아질 예정입니다.

 A4용지 단면과 MLCC의 크기 비교(삼성전기 제공)© 뉴스1
 A4용지 단면과 MLCC의 크기 비교(삼성전기 제공)© 뉴스1

더불어 삼성전기는 회사의 미래를 위해 그동안 IT용 MLCC보다 생산·매출 비중이 작았던 전장(전기·전자 장비) 부품용 MLCC로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분야는 '자동차'입니다. 전기 자동차 판매가 늘어나고 자동차 내부에 편의 기능을 위한 전자 장치 탑재가 일반화되면서 전장용 MLCC에 대한 수요가 점차 늘어날 전망이기 때문입니다. 과거 차량에 탑재되던 전자제어장치의 양은 30개에서 최근 100개까지 늘었고 향후 자동차 1대당 MLCC 소요량도 차량에 따라 3000~9000개까지 증가할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자율주행 기능이 더 발달한다면 데이터 처리를 위한 더 전력 소모도 늘고  MLCC 사용도 더 늘어날 전망입니다. 

자동차 전장용 MLCC의 경우 차량을 움직이는 데 쓰이는 만큼 IT용 MLCC보다 악조건을 견딜 수 있어야 합니다. 자동차의 엔진에서 내뿜는 고온의 열기와 차체가 흔들리면서 방생하는 진동을 견뎌야 하니깐요. 자동차의 사용 수명이 스마트폰 등 전자기기에 비해 길어 내구성이 필요하다는 것도 자동차 전장용 MLCC 개발의 어려운 점입니다. 그렇기에 크기도 IT용 MLCC에 비해 더 크고 가격도 최소 3배에서 10배까지 비쌉니다. 

이렇듯 향후 MLCC 시장은 자동차 전장 분야가 주도할 것으로 보입니다. 삼성전기는 올해 14조원 정도로 측정되는 MLCC 시장이 2024년에는 20조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전장용 MLCC의 비중은 20%에서 35%로 확대될 것으로 보고있고요. 

삼성전기는 현재 전 세계 MLCC 시장에서 20%대의 점유유율 확보면서 2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점유율 30%가 넘는 일본의 '무라타'(Murata)와는 좀 격차가 있는 상황입니다. 특히 전장용 MLCC 분야에서는 일본업체들에 밀려 글로벌 3위 정도로 평가받고 있죠. 이에 삼성전기는 전장용 MLCC에 집중해 2022년까지 전장용 MLCC 시장 점유율 2위를 차지하고 무라타와의 격차도 좁혀간다는 전략입니다. 

정해석 삼성전기 컴포넌트전장개발 그룹장(상무)은 "회사는 다수의 글로벌 자동차업체로부터 엄격한 검증을 통과했고 공급을 늘리고 있다"라며 전장용 MLCC 분야에 대한 자신감을 내비치기도 했습니다. 이어 정 그룹장은 향후 기술 개발에 대해서도 "제가 처음 입사할 2004년에는 200층을 쌓는 것도 어렵다고 했지만 그때 당시 한계라고 했던 것들이 깨지고 있다"라며 "앞으로도 기술적 한계들을 새로운 재료나 공법을 이용해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한편, 부산시 강서구 녹산산업단지에 위치한 삼성전기의 부산공장은 MLCC를 비롯해 전자 기판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약 26만㎥(8만평) 부지에 20여개의 건물이 빼곡히 들어서 있고 약 5000여명의 인력이 근무하고 있어 고용인원 기준 부산지역 최대의 사업장이기도 합니다. 

삼성전기 부산공장의 클린룸에서 작업자가 일하고 있다(삼성전기) © 뉴스1
삼성전기 부산공장의 클린룸에서 작업자가 일하고 있다(삼성전기) © 뉴스1
로딩 아이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