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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정경심 재판에서 드러난 씁쓸한 '스펙 품앗이'

교수들끼리 자녀 스펙 품앗이 한 사실 수 건 드러나
文 "대학입시제도 전반 재검토"…공정사회 위해 필요

[편집자주]

사모펀드와 자녀 입시비리 의혹을 받는 정경심 동양대 교수가 23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자본시장과금융투자업에관한법률위반 등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2020.7.23/뉴스1 © News1 임세영 기자
사모펀드와 자녀 입시비리 의혹을 받는 정경심 동양대 교수가 23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자본시장과금융투자업에관한법률위반 등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2020.7.23/뉴스1 © News1 임세영 기자

2018년 8월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출근 중 라디오를 들었다. 대통령직속 국가교육회의 산하 대입제도 개편 공론화위원회의 결과 발표가 있은 다음 날이라 방송 주제도 자연스럽게 입시제도 이야기로 시작했다. 앵커는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중심 전형을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는 것이 발표의 골자였는데, 45% 이상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안이 가장 많이 나왔다고 전했다.

귀를 의심했다. 45%로 확대? 기자가 대학에 들어가던 2006년에는 대다수가 수능을 통해 대학에 들어갔고, 수시로 대학을 가는 학생들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중·고등학생 아이를 둔 선배, 취재원들은 "바뀐 지가 언젠데"라며 핀잔을 줬다. 바야흐로 '학종'(학생부종합전형)의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수능 하나만 잘 봐서는 좋은 대학에 가기 힘들어졌다. 자기소개서와 각종 대회에서의 수상경력, 체험활동, 교사 추천서 등등 평가항목은 더 많아졌다. 수능 하나에 '올인'하던 시대에서 다양성을 좀 더 반영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입시전형이 바뀐 것이다.

"결국 현행 입시제도는 부모가 교수인 학생들이 제일 유리하다". 한 선배가 넌지시 한 말이다. 아직 자녀가 없던 때라 입시는 남의 이야기라 그저 흘려들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 법정으로 온 정경심 동양대 교수의 '입시비리' 혐의 재판에서 선배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됐다.

정 교수의 유무죄를 떠나 이 재판에서는 교수들의 자식들 '스펙 품앗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광렬 전 KIST 기술정책연구소장은 정 교수의 부탁을 받고 정 교수 딸 조민씨의 증명서를 확인도 없이 발급해줬다고 증언했다.

조씨를 논문 1저자에 올려준 장영표 단국대 의대 교수도 조씨 대입에 도움을 주기 위해 1저자로 올린 것이라고 말했다. 장 교수 아들은 조국 전 장관이 근무했던 서울대의 공익인권법센터에서 인턴활동 확인서를 받았다.

장영표 단국대 의대 교수/뉴스1 © News1 이동해 기자
장영표 단국대 의대 교수/뉴스1 © News1 이동해 기자

지난 4월 검찰이 공개한 김광훈 공주대 생명과학과 교수와 조씨, 정 교수와의 대화 녹취록에서는 김 교수가 조씨의 대학원 면접 리허설을 해주는 대목이 나왔다. 김 교수는 조씨에게 허위 인턴활동 증명서를 발급해주고, 조씨를 논문 초록(抄錄)과 포스터에 제3저자로 등재시킨 의혹을 받고 있다. 김 교수는 "조씨가 연구에 참여한 사실이 없다"며 자신의 행위가 부적절했다고 시인했다.

조씨가 졸업한 한영외고 유학반 학생들의 방과후 프로그램으로 외국 대학 입시를 지도한 디렉터 김모씨도 인턴 등 체험활동을 학생들에게 제공해줄 수 있는 학부모의 신청을 받아 학생들을 연결해준다고 법정에서 증언했다. 학교 차원에서 '스펙 품앗이'가 이뤄진 것이다.

최강욱 열린민주당 대표 재판에서는 정 교수와 신욱희 서울대 교수와의 녹취록이 공개됐다. 녹취록에는 '스펙 품앗이'를 넘어 청탁을 의심케 하는 정황이 나왔다. 정 교수가 "아들이 군대 끌려가게 생겼다"고 토로하자 신 교수가 '연세대와 고려대 교수들에게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한 내용이 나온다.

신 교수는 또 고려대 교수를 통해 조씨의 합격 여부를 미리 알아보기도 한 사실을 검찰 조사에서 시인했다. 신 교수는 검찰 조사에서 "부담 느꼈지만 정 교수가 부탁을 하니 이야기했다"고 했다.

재판을 지켜보면서 드는 감정은 '박탈감'이었다. 현재 입시 시스템이 좋은 대학, 대학원을 가기 위해 학생들에게 수많은 스펙을 요구하고 있고, 부모를 잘 만난 학생들은 더 많은 스펙을 손쉽게 쌓을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이 재판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교수들의 이런 '은밀한 거래'(?)가 정 교수뿐일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니 더욱 씁쓸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9월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와 관련해 가족을 둘러싼 논란이 있는데, 이 논란의 차원을 넘어서서 대학입시제도 전반에 대해 재검토를 해달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그동안 입시제도에 대한 여러 개선 노력이 있긴 했지만, 여전히 입시제도가 공평하지 않고 공정하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국민들이 많다"며 "특히 기회에 접근하지 못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깊은 상처가 되고 있다. 이런 점을 직시해야 한다"고도 언급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사태 때문인지 문 대통령의 재검토 지시가 1년 가까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교육제도 개편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코로나19가 잦아들면 문 대통령이 언급했던 것처럼 현행 입시제도가 공정의 가치를 훼손하고 있는지를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그래야만 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로운 사회에 살고 있다고 국민들이 체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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