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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인사이트] 이상한 문건

문안은 남측, 양식은 북측…형식 뒤섞인 문건
정식 문건 아닐 가능성 커, 출처 명확히 밝혀야

[편집자주] 2018년부터 북한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동북아시아 정세는 급변했다. '평양 인사이트(insight)'는 따라가기조차 쉽지 않은 빠른 변화의 흐름을 진단하고 '생각할 거리'를 제안한다.

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가 지난 2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보위 전체회의에서 열린 박지원 국정원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박 후보자에게 남북 합의서를 공개하며 질의를 하고 있다. 2020.7.27/뉴스1 © News1 박세연 기자
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가 지난 2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보위 전체회의에서 열린 박지원 국정원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박 후보자에게 남북 합의서를 공개하며 질의를 하고 있다. 2020.7.27/뉴스1 © News1 박세연 기자

5년 전쯤 대북 사업을 중개하는 '브로커'를 자처하는 A씨를 만났다. 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6년에 서명했다는 문건의 사본을 보여 줬다.

문건의 내용은 북한의 저작권 관련 사업을 A씨에게 위임한다는 것이었고, 그는 자신과 사업을 하면 북한에서 나오는 콘텐츠를 '합법적으로' 쓸 권리를 갖게 된다고 했다.

다음과 같은 이유로 관심을 끊었다. △사망한 최고지도자 때의 결정이 유지되고 있다고 믿기 어려움 △원본의 존재 여부를 알 수 없음 △다른 방식으로 A씨의 주장이 확인되지 않음.

북한과 관련된 문건은 수도 없이 많다. 바꿔 말하면 위조된 문건이 많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북한 당국의 지시나, '1호'의 발언이 담겼다는 내부 문건이 가끔 밖으로 도는데, 그중 '진짜'는 많지 않다.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김정일 국방위원장 유언장' 사건이다. 국내의 한 고위 탈북자가 김정일 위원장의 유언장을 입수했다며 이를 공개한 사건인데, 길게 설명할 필요 없이 이 유서는 허구임이 확인됐다.

당시 이 유언장을 공개한 탈북자는 "출처를 밝힐 수는 없다"면서도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측근에게 크로스체킹을 했다"라고 주장했는데 얼핏 모순된 두 내용이 겹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지난 27일 국회에서 개인적으로는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문건이 하나 공개됐다.

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가 공개한 이 문건은 과거 박지원 국가정보원장(당시 후보자)이 관여했다는 것으로, 우리 정부가 북한에 총 30억 달러의 투자와 경제협력차관을 제공키로 합의했다는 내용이 담긴 합의서였다.

합의서의 작성 일자는 2000년 4월 8일. 남북의 첫 정상회담을 앞둔 상황에서 이뤄진 것인데, 결국 북한이 정상회담에 임하는 조건으로 우리 측에게 엄청난 금액의 보상을 받기로 했다는 해석이 나오게 만드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형식과 양식이 좀 이상했다. '남과 북은'으로 시작하는 합의문 문장은 남측에서 작성한 것인데, 합의문의 폰트와 어투들 모두 북한의 방식이었다.

단언하는데, 이런 방식으로 작성된 남북 간의 합의문은 없다.

남북은 같은 합의문도 각자의 방식으로 따로 정리해 두 문서에 모두 서명한다. 남측이 작성한 합의문은 '남과 북은'으로 시작하며 모든 문법과 단어가 표준어법에 입각해 작성된다. 폰트 역시 우리 측 폰트가 사용된다.

북측이 작성한 합의문은 '북과 남은'으로 시작해 모든 어법과 단어가 북한의 표준어법에 입각해 작성된다. 폰트도 북한의 폰트가 사용된다.

이번에 공개된 문건의 오류는 이렇다. '남과 북은'으로 시작되는, 남측에서 작성됐어야 마땅한 문건에 '딸라'라는 북한식 단어가 등장하며 북한의 폰트가 사용됐다.

짧지 않은 남북 대화의 역사에서 해당 문건만 특별히 다른 양식으로 남북이 작성하고 서명할 맥락과 이유는 찾을 수 없다. 적어도 이 시점의 기준으로 해당 문건이 진짜일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는 뜻이다.

석연치 않은 장면들이 있긴 했다. 박지원 원장은 청문회 과정에서 해당 문건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며 '말 바꾸기'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 주 대표는 문건의 출처를 '고위 당국자 출신'으로 밝혔다. 정확한 출처를 밝히기 어렵다고 하면서다.

하지만 이 문건의 진위 여부를 알 수 있는 시작점은 문건의 입수 경위라고 볼 수 있다. 이른바 '4·8 남북 합의'가 상당한 수준의 비밀 합의였음을 감안하면 이 문건의 출처는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다. 이 같은 문건이 실제 존재했다면, 그 존재를 알 수 있는 인물조차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출처를 흐리는 것은 복잡한 남북관계 역사의 한 장면에 복잡함을 가중할 뿐이다. 문건이 진품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번 사안을 제대로 정리해 놓지 않으면 가뜩이나 복잡하고 어려운 남북관계의 역사에 '찜찜함'마저 덧발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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