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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종 칼럼] 숀 코너리가 남긴 정신

[편집자주]

© News1 
영화 '007' 배우 숀 코너리가 지난 10월 말 9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초기의 007시리즈 영화를 보며 청년기를 보냈던 사람들은 두 가지 감회에 젖었을 법하다. 하나는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가 죽었다는 상실감, 또 하나는 세월의 빠름에 대한 놀라움이다.

30대 초반의 직장인과 얘기하다 우연찮게 숀 코너리 사망 소식을 얘기했더니 그 젊은이는 뉴스에서 보았다고 말했으나 담담했다. 007 영화가 유명했다는 걸 듣기는 했지만 본 적도 없고 관심도 별로 없었고 더구나 코너리에 대한 기억도 없다는 것이다. 스타의 부고에 대한 감회는 나이에 따라 이렇게 다르다.  

서양 영화라면 말 타고 총 쏘는 서부극에 익숙해 있던 시절, 영국의 첩보원 제임스 본드가 매혹적인 '본드 걸'과 어울리며 기상천외한 행동으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007 영화는 반세기 전 냉전시대를 살았던 젊은이들에겐 긴장과 즐거움을 공급했던 전혀 새로운 상상의 세계였다.

'007 위기일발'은 내가 처음 본 007 영화다. 이 영화의 원제목이 'From Russia With Love'란 것은 이 글을 쓰기 위해 검색하다 알게 됐다. 언어 감각이 부족했던 나에게 '위기일발'이란 말의 뜻을 이미지화해서 이해하게 된 것은 '007 위기일발'이란 한국식 영화 제목 덕이 컸던 것 같다.
    
뉴욕타임스는 부고 기사를 중요시한다. 정치 지도자는 물론 어떤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던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삶의 궤적을 보도한다. 지난 달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사망했을 때도 지면의 3분의 1을 할애하여 보도했다. 숀 코너리의 부고 기사는 2쪽이나 할애하여 그의 영화 인생과 함께 가난했던 유년기와 방황하던 청년기를 자세히 소개했다.

007 영화는 영국 작가 이언 플레밍이 영국 첩보기관원 제임스 본드를 주인공으로 설정해서 창작한 스파이 소설 시리즈다. 플레밍은 작가가 되기 전 영국 해군과 첩보기관에서 여러 해 근무하며 쌓은 경험을 토대로 스파이들의 성격과 행동 양태를 조합하여 제임스 본드라는 가상 첩보원을 창작했다. 숫자 '007'은 소설 속에서 첩보원 제임스 본드에게 주어진 살인면허 암호명으로 영화가 유명해지면서 소설의 제목을 덮어 버린 셈이다.

188㎝의 키에 검은 머리의 외모를 가진 숀 코너리는 이언 플레밍이 상상했던 이상으로 제임스 본드의 성격을 탁월하게 파악했던 완벽한 제임스 본드 배역으로 평가받는다. 007 영화가 반세기 이상 계속 나오면서 8명의 배우가 본드 역을 계승했는데, 작가 플레밍은 첫 영화가 나오기 전 본드 역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로 코너리가 아니라 로저 무어를 꼽았다는 일화도 있다.

코너리는 1930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근교의 양조장 옆집에서 태어났다. 화장실을 세 가구가 공동으로 쓰는 가난한 동네였다. 아버지는 고무공장에서 주급 2파운드(요즘 화폐가치로 3만5000원)을 받고 어머니는 비정규직 청소원으로 일했다고 하니 당시 스코틀랜드의 삶을 상상할 만하다. 코너리는 9세부터 우유배달 일을 했다. 새벽 4시에 마차에 우유를 싫고 4시간 동안 배달하고 학교에 갔다. 14세에는 아예 우유배달을 직업으로 삼았다.  

그는 청소년기에 할 일을 찾아 방황했다. 17세에 12년 근무계약을 하고 해군에 입대했으나 병에 걸려 2년 후 강제 전역됐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군인들이 돌아오면서 일자리가 귀했다. 그는 가구 광택 내는 일을 잡았고 그때 영안실에서 관의 광택을 내는 일도 했다.

그가 영화배우로 출세한 계기는 뮤지컬 단역이었다. 1953년 친구와 함께 보디빌딩 대회에 출전하자며 런던으로 갔다. 미스터 유니버스에 출전해서 조그만 상을 받기는 했지만, 당시 순회공연 중이던 뮤지컬 '사우드 퍼시픽'(South Pacific)의 합창단원을 뽑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지원했다. 합격했다. 이유는 그의 선원다운 얼굴과 물구나무서기 실력이 감독의 눈에 들었다는 것. 이 뮤지컬이 발판이 되어 그는 연극무대와 TV에 출연하게 되었고 이어 영화배우가 되었다.

코너리의 인생 역정에서 매우 인상적인 것은 그의 애향심과 독서관이다. 그는 해군에서 제대하자 팔에 두 개의 문신을 새기고 살았다. 하나는 'Mum and Dad'(엄마 아빠)이고 다른 하나는 'Scotland Forever'(스코틀랜드여 영원하라)다. '스코틀랜드인의 정체성은 존재의 근본'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잉글랜드인으로 변신하기를 거부했다. 스코틀랜드 독립당에 기부하고, 2016년 스코틀랜드 독립 국민투표를 놓고 여론이 비등했을 때 신문 기고문에서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것보다 더 창의적인 일은 없다"고 독립을 주장했다.

코너리 스스로 술회했듯이 '독서는 배우 코너리를 만들었다'고 할 만하다. 그는 촬영 중에도 틈나는 대로 책을 읽었다. 그의 독서 습관은 뮤지컬 '사우드 퍼시픽' 공연 여행을 할 때 길러졌다.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멘토를 만났던 것이다. 미국 출신 배우 로버트 헨더슨이 젊은 합창단원인 코너리에게 관심을 갖고 책 읽기를 권유하면서 구체적인 독서 프로그램까지 만들어 주었다. 멘토의 충고에 따라 희곡작가 조지 버나드 쇼, 오스카 와일드, 헨릭 입센의 작품과 토마스 울프의 소설,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탐독하면서 배우의 길을 닦았다. 그는 말년에 신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틈나는 대로 연극도 봤지만, 책을 읽었다. 진짜 인생을 바꾸는 것은 독서다. 내가 그 증거다."

코너리가 젊은 날 할 일을 못 찾아 방황했고 멘토를 만나 책을 읽고 삶을 변화시켰다는 일화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교훈이 됨직하다. 20세 전후의 청년들은 방황하게 마련이다. 코너리도 그랬고, 세계 최고 기업을 만든 스티브 잡스도 가정사정으로 대학을 중퇴하고 무엇을 하며 살지 몰라 방황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들에게 보장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찾아 헤매고 마음을 끄는 것이 보이면 거기에 골몰했다.  <뉴스1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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