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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군 숨은 독립운동가 조인원 선생…재조명 목소리

예산서 제일 먼저 독립선언문 낭독…독립만세 선창
윤봉길 의사 봉환 추진…2008년 대전현충원에 안장

[편집자주]

야운(冶雲) 조인원(趙仁元)
(애국지사 제3묘역-832, 독립유공자 관리번호 8160호, 1875. 4. 19~1950. 12. 21).© 뉴스1

올해로 102주년인 삼일절을 맞아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나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조인원 선생을 재조명하자는 목소리가 그의 고향인 예산 지역에서 일고 있다.

조인원 선생은 1919년 당시 예산서 제일 먼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는 등 예산군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인터넷 검색에서 전혀 나오지 않을 정도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에 뉴스1은 ‘대전현충원묘적부’, ‘신분장지문조회회보서’ 범죄인명부, 동아일보(1921. 8. 21), 예산향토사 ‘예산의 맥(脈)’, 예산의인물(충청남도문화원) 회암서원창건록, 디지털예산문화대전, 봉산면지 등을 참고해 그의 흔적을 찾았다. 

충남 예산에서 시작된 충청권 3·1운동을 비롯해 부친인 조종호 선생과 조인원 선생 일대기, 정부 포상 등을 살펴본다.

◇충청권 3.1운동 시발점…충남 예산서 시작
충청권 3·1운동은 1919년 3월 3일 충남 예산을 시작으로 4월 18~19일 충북 제천 송학면 시위까지 총 201건(충남 117건, 충북 84건)이 전개됐다.

예산에서 시작된 충남지역 3·1운동은 부여, 서천, 논산, 당진, 아산, 연기, 공주, 천안 등으로 이어졌다.

이 같은 구체적 수치와 일자는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개한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알려졌다.

특히 예산군 독립만세 운동의 시발점이 됐던 한내장 독립만세 운동 당시를 재현하는 ‘한내장 4․3 독립만세운동 기념행사’는 매년 4월 3일 예산군 고덕면 한내장터 일원에서 열린다.

◇조인원의 부친, 조종호는 누구인가?
조인원 선생의 부친은 조극선의 후손이며 감찰공을 지낸 조종호(趙鐘灝)다. 충남 예산군 봉산면 시동리 185번지에서 태어났다.

1896년 4월 흥선대원군에 의해 철폐된 회암서원의 유허비를 설립하고 회암서원창건록을 작성 교육을 계승하는데 공헌했으며 1907년부터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적극 참여했다.

조종호는 당곡리 박씨 일가와 함께 1908년 덕산초등학교 부지에 사학당(보통학교 덕창학원)을 설립 운영했다.

사학당은 1911년 8월 일본의 조선교육령 선포로 인해 운영이 강제 폐지되고 정부에 무상으로 헌납됐다. 1912년 덕산공립초등학교로 설립 전환됐다.

야운 조인원의 묘는 예산군 봉산면 시동리 한양조씨 선산 천태산에 있었으나 2008년 5월 19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뉴스1

◇야운(冶雲) 조인원(趙仁元)의 활동

조종호의 장남인 조인원이 태어난 시기는 대내적 민중봉기가 있었던 시기였다.

그는 북청거주 상해 임시정부 독립단의 백범과 처가집안 신익희선생과 연락했으며 상해 임시정부 파견원인 이영식과 수시로 연락했다.

대한독립단 충청도 지단을 조직하고 지단장에 서병익, 부단장에 김석주가 활동하는 가운데, 그는 서무부장(자금책)으로서 각종 독립운동 관계 문건의 배포에 주력했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 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났고 충남에선 홍성, 청양, 당진 등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는데 1919년 4월 3일 한내장날이며 고종황제 장사날인 이 날을 이용, 군중들과 합세해 만세운동을 추진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고덕면 용리 마기상은 이종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인수, 천주교 지방교구 조직망을 이용해 독립선언서 배포에 주력했다.

뜻을 같이한 지인들, 1000명의 주민 시장상인들은 독립만세 시위에 나섰고 조인원은 제일 먼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했다.

이 과정에서 청년 인한수가 일본 헌병에 피살되자 장문환 등 약 15명과 함께 격렬한 항의를 하고 장례를 치러 주었다.

그는 1920년 12월 20일에 “한국인은 납세(納稅)하지 말라”는 내용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정서(軍政署) 명의로 된 선전문을 삽교읍(당시 삽교면) 역촌리 게시판에 부착하는 등 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1921년 9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실형을 언도받고 징역 6월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후 일본경찰의 감시가 심해진 가운데 전남 목포를 경유해 만주로 가려고 하는 중 일경에 잡혀 심한 고문을 치르는 수난을 겪었다.

이후 일경의 가족 살생부 지령에 의해 본인 및 자손 또한 일정 기간 도망다녀야 했다.

봉산에 학교설립을 위해 수년간 부지 및 설립기금모금을 추진했으며 거액의 설립기금 기부는 물론, 주민들을 설득해 힘을 모아 1936년 4월 1일 봉산공립보통학교를 설립했다.

추진과정에서 주민들이 반대했을 때 “학교를 세워 배워야 나라가 있다. 만약 학교추진을 반대하면 나는 할복해 죽을 것이다”라며 설득했다.
  
윤봉길 의사 서거 후 일본으로 잠입해 윤의사의 묘소를 파악하고 해방 후 1946년 7월에는 윤 의사의 시신을 효창공원 묘역으로 봉환을 적극 추진했다.

조인원은 1949년 12월 21일 75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예산군수가 1969년 8월 충남 예산군 봉산면 시동리 산7-3에 독립유공기념비를 건립해 주었다.© 뉴스1

◇건국포장·건국훈장애족장 추서 
1969년 8월 충남 예산군 봉산면 시동리 산7-3에 예산군수가 독립유공기념비를 건립해 주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77년 건국포장, 1991년 건국훈장애족장을 추서했다.

그의 묘는 예산군 봉산면 시동리 한양조씨 선산 천태산에 있었으나 2008년 5월 19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그가 태어난 예산군 봉산면 시동리 185번지 집은 현재 후손이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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