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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만에 찾아온 물가 대란…'폴 볼커의 길' 고심하는 한은

기대 인플레이션 3.3%…물가 안정 목표치 2% 상회
이창용 한은 총재 "앞으로 몇 년간 인플레와 싸워야"

[편집자주]

20세기 가장 위대한 중앙은행 총재로 평가받은 폴 볼커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 로이터=뉴스1 © News1 박형기 기자
20세기 가장 위대한 중앙은행 총재로 평가받은 폴 볼커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 로이터=뉴스1 © News1 박형기 기자

"과연 '폴 볼커의 길'로 가게 되는 걸까."

우리나라 통화당국인 한국은행 내에서 최근 들어 자주 회자되는 질문이다. 폴 볼커는 1979년 미국에서 2차 석유 파동이 일어나 물가상승률이 11.8%로 치솟았을때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으로 취임한 인물이다.

그는 취임 후 곧장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기준금리 4%포인트(p) 인상을 시작으로 과감한 초(超)고금리 정책을 단행했다. 1979년 9월 11.5%였던 미국의 기준금리는 반년 만인 1980년 3월 20%까지 급등했다.

이는 시장에선 가히 '학살'로 표현됐다. 시중 돈줄이 마르면서 주식과 집값이 폭락했고, 곧 기업들의 줄파산과 실업률 폭등으로 이어졌다. 연준 건물로 시위대가 몰려와 군대가 배치됐으며 볼커는 살해 위협까지 받는 상황에 처했다.

경기 침체라는 희생을 치르면서도 볼커는 고(高)물가를 잡기 위해 초고금리 정책으로 시장에 충격을 줬으며 결국 인플레이션이 잡히면서 미국 경제는 안정 궤도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폴 볼커가 가장 중시한 것이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였다. '물가 안정을 위해선 기대 심리를 꺾어버려야 한다'는 판단하에 고금리라는 독한 처방을 내린 것이다. 볼커의 이러한 신념은 후대 중앙은행가들의 행동강령처럼 자리 잡았다.

43년이 흐른 지금, 우리나라 중앙은행인 한은에 비상이 걸린 이유도 향후 1년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에 대한 전망을 나타내는 기대 인플레이션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한은에 따르면 5월 기대 인플레이션율은 전월 대비 0.2%p 오른 3.3%를 기록했다. 2012년 10월(3.3%) 이후 9년7개월 만의 최고치다. 이로써 기대 인플레이션은 지난 4월(3.1%)에 이어 2개월 연속 3%대를 기록하게 됐다. 한은의 물가 안정 목표치인 2%를 훌쩍 상회한다.

이미 우리나라 4월 물가상승률이 4.8%를 기록하며 5% 선까지 넘보는 상황에서 임금과 물가가 나선형의 상승 곡선을 타고 걷잡을 수 없이 오를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 News1 김초희 디자이너
© News1 김초희 디자이너

물가가 앞으로 더 오를 것이라는 소비자들의 기대심리를 한은이 제때 꺾지 못할 경우 우리나라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물가 대란에 직면할 수 있다.

이창용 한은 총재도 일찌감치 이러한 상황을 경고했다. 지난달 19일 인사청문회에서 "앞으로 몇 년간은 인플레이션과 싸워야 할 것"이라면서 "물가 상승의 심리가 지금 올라가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좀 인기는 없더라도 시그널을 줘서 물가가 더 크게 올라가지 않는 데 전념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이 총재가 한은의 수장으로서 첫발을 내딛기 직전부터 수년에 걸친 물가와의 전쟁을 선포한 셈이다.

그는 지난 16일에는 "앞으로 '빅스텝'(기준금리 0.50%포인트 인상)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느냐를 말씀드릴 수 있는 단계는 아닌 것 같다"며 강한 매파적 색채를 드러내기도 했다. 4월에는 빅스텝 가능성에 대해 "필요성이 크지 않다"고 선을 그었지만, 한 달이 흐른 지금 미국의 가파른 기준금리 인상에 발맞춰 우리나라 역시 빅스텝을 단행할 여지를 열어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총재가 미국 볼커 의장이 택한 고통스러울 정도의 통화 긴축 상황으로 내몰린 것은 아니다. 한은은 이미 지난해 8월부터 기준금리를 인상하기 시작해 11월과 올해 1월, 4월에 걸쳐 기준금리를 0.25%p씩 올렸다.

다만 물가 안정이 시급한 해결 과제로 떠오른 만큼 이 총재는 당분간 통화 긴축 정책을 강하게 이끌어갈 전망이다.

금융권은 당장 오는 26일 열리는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기준금리가 0.25%p 오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금융투자협회가 채권운용 종사자 1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들 가운데 94%는 5월 기준금리가 오를 것이라고 예상했다. 종전 조사에서 시장참여자 절반(50%) 정도만 인상 가능성을 점쳤던 것에 비해 크게 오른 수치다.

지난 4월에 이어 5월에도 기준금리가 오르면 한은이 정책금리를 기존의 콜금리 목표에서 기준금리로 변경한 2008년 3월 이래 첫 2개월 연속 기준금리 인상 사례로 남을 전망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신임 총재가 지난달 21일 오후 서울 중구 부영태평빌딩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2022.4.21/뉴스1 © News1 사진공동취재단
이창용 한국은행 신임 총재가 지난달 21일 오후 서울 중구 부영태평빌딩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2022.4.21/뉴스1 © News1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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