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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톡파원25시'는 왜 황급히 카메라를 돌렸을까?

[편집자주]

클림트의 마지막 아틀리에 전경. /사진=조성관 작가
클림트의 마지막 아틀리에 전경. /사진=조성관 작가

'톡파원25시'라는 jtbc 예능 교양 프로그램이 있다. 세계 각국의 문화예술을 현장 취재로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전현무, 김숙, 이찬원 등이 출연해 '톡파원'들이 찍어온 동영상을 보면서 몇 마디씩 코멘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톡파원25시는 그간 TV에서 보기 어려웠던 상당한 수준의 깊이를 보여준다.

43회(지난 1월2일 방송)는 오스트리아 편이었다. 오스트리아가 배출한 음악과 미술의 천재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구스타브 클림트, 에곤 실레를 다뤘다. 천재시리즈의 신호탄이 된 '빈이 사랑한 천재들'에서 첫 번째로 다룬 인물이 클림트였다. 나는 혹시 내가 놓치거나 빠트린 부분이 있지나 않을까 해서 신경을 곤두세웠다.

'빈이 사랑한 천재들'에서 나는 클림트의 생가에서 묘지까지 화가의 삶과 예술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면 거의 다 발로 취재했다.

톡파원25시는 그중에서 벨베데레 궁전, 레오폴트 미술관, 클림트 빌라, 히칭의 공원묘지 4곳을 보여주었다. 모두 클림트 순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들이다. 벨베데레 궁전은 '키스'가 붙박이로 상설 전시되는 미술관이고, 레오폴트미술관은 클림트와 에곤 실레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다.

클림트 빌라는 클림트가 죽기 전 사용한 '마지막 아틀리에'를 말한다. 2006년, 내가 처음 취재를 갔을 때만 해도 '마지막 아틀리에'는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다. 이곳을 관리하는 클림트협회에 사전 연락을 하고 방문 목적을 설명해야만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빈에 사는 지인이 클림트협회와 접촉해 날짜를 잡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마지막 아틀리에가 국내 최초로 책에 소개되었다. 이후 방문 희망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몇 년 후 마지막 아틀리에는 '클림트 빌라'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하며 일반에 공개됐다. 지금 이곳은 클림트 팬들이 반드시 찾아가는 순례 코스가 되었다.

클림트 빌라에서 우리는 크게 두 가지를 느낄 수 있다. 하나는 클림트의 작업 스타일이다. 클림트는 작업실에 이젤을 두세 개 세워놓고 동시에 여러 작품을 그렸다. 작업실에는 클림트가 그림의 밑부분을 칠할 때 사용한 일명 '목욕탕 의자'가 놓여 있다. 이 목욕탕 의자만이 진짜다. 이젤에 걸려 있는 미완성 작품은 복제품, 즉 레플리카다.

다른 하나는 클림트 예술 세계에 영향을 미친 미술을 접할 수 있다. 내가 2006년에 처음 방문했을 때 유리 진열장에는 중국 회화책 2권, 일본 회화책 1권이 전시되어 있었다. 클림트가 이 화실에서 지낼 때 틈틈이 들여다본 책이다.  
 구스타브 클림트 /사진=구글
 구스타브 클림트 /사진=구글
클림트 예술이 평가받는 이유

19세기 빈 화단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클림트를 발탁했던 화가들이 있었다. 그런데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그들을 한 명도 기억하지 못한다. 과거의 양식을 답습하며 현실에 안주하다 썰물에 떠내려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클림트는 달랐다. 과거 양식을 거부하며 새로운 미술 흐름을 과감하게 수용하기로 한다.

1897년 분리파를 창설한다. 독일어로 제체시온(Secession). 과거 양식과 결별한다는 뜻. 클림트는 분리파를 창설해 초대 회장이 된다. 기성 화단에서 이런 클림트를 거칠게 공격했다. "배은망덕한 놈"이라 운운하며.

서양에서 길을 잃으면 언제나 동양에서 길을 찾았다. 종교도 그랬고 철학도 그랬다. 클림트는 동양 미술, 그중에서 특히 일본 미술의 장점을 과감하게 수용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화가 클림트의 천재성을 읽을 수 있다.

클림트 빌라는 내가 처음 갔던 '마지막 아틀리에' 시절과는 전시 구성이 크게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카메라 방향을 주시했다. 과연,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예, 응접실에는 벽면 한쪽을 클림트에 영향을 준 일본미술과 중국미술 관련 이미지들로 채워놓았다. 클림트가 공부한 3권의 미술책에 나오는 컬러 도면을 확대해 전시한 것이다. 응접실은 동양풍으로 코를 찔렀다. 19세기 유럽 상류층에서 유행한 자포니즘과 시누아즈리의 현장이다.

지금부터는 톡파원25시 장면이다. 이 장면은 정확히 26초 동안 나온다. 자막을 옮겨보면 이렇다. '동양 그림과 장식들로 응접실을 꾸민 클림트' '동양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클림트' '클림트의 응접실'(중국풍?) '작품에서도 드러나는 동양의 화풍'.
  
톡파원25시 카메라에 잡힌 응접실의 벽면. / 사진=조성관 작가
톡파원25시 카메라에 잡힌 응접실의 벽면. / 사진=조성관 작가

그런데 톡파원25시의 카메라는 이상했다. "클림트가 동양문화에 영향을 받았다는군요"라는 멘트만 하고 카메라는 관련 자료를 클로즈업하지 않았다. 출연진들도 "아, 클림트가 동양미술에 영향을 받았군요"라고만 말했다. 그리곤 카메라를 휙 돌렸다. 어떤 동양미술인지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고 아틀리에를 나왔다. 누가 봐도 중국풍과 일본풍이라는 것은 느꼈을 텐데. 아마도 톡파원도 이 부분을 촬영했을 것이다. 그런데 편집하는 과정에서 그 부분을 아예 통째로 들어냈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클림트의 예술을 찬미하는 것은 출세작인 부르크극장의 천장화 때문이 아니다. 미술사박물관의 벽화인 '이집트 여인'은 더더욱 아니다. '키스' '다나에' '유디트' '아들레 블로어 바우어의 초상' '기다림' '베토벤 프리즈' 등과 같은 작품들로 인해서다. 이 작품들은 모두 분리파 활동을 한 이후에 탄생한 것들이다. 

미완성 작품이 전시 중인 클림트 화실 모습. 일명 목욕탕 의자만이 진짜고 나머지는 복제품이다. /사진=조성관 작가 
미완성 작품이 전시 중인 클림트 화실 모습. 일명 목욕탕 의자만이 진짜고 나머지는 복제품이다. /사진=조성관 작가 

왜 클림트의 작품은 분리파 이전과 그 이후로 구분되는가. 서양미술의 전통에서 한계를 느낀 클림트는 새로운 길을 모색했고, 동양 미술에서 그 길을 발견한다. 클림트는 특히 일본미술의 장점을 자신의 그림에 융합해 새로운 예술을 창조해나갔다. 클림트 예술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일본미술을 빼면 설명이 불가능해진다. 이것은 프랑스 인상주의 회화를 이야기하면서 일본 우키요에(浮世繪)를 생략하는 것 같다.

분리파 회장 클림트가 1900년 분리파회관에서 야심 차게 전시한 기획전이 '일본회화 특별전'이었음을 상기해보라. 고흐, 모네 같은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클림트 역시 일본 작가들에 심취했다. 그중에서 클림트를 사로잡은 일본 화가는 오가타 코린(尾形光琳·1658~1716)이었다. 이른바 '린파'를 창시한 일본 장식미술의 대가.

톡파원25시는 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생략했을까. 거장의 발자취를 따라간다면서 결정적인 부분을 건너뛰었나. 시간이 부족해서였을까, 아니면 리서치 부족으로 인한 단순 실수였을까. 이것도 아니라면 어떤 다른 의도가 개입된 것일까.

* 외부 필진의 글은 뉴스1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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